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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와 동아시아 평화

<한•일 문제를 보는 한 시각 1, 민의 프레임은 무엇인가?> - 경제전쟁의 프레임, 국가•애국주의 프레임의 유혹과 위험

by yunheePathos 2019. 8. 10.

<한•일 문제를 보는 한 시각 1, 민의 프레임은 무엇인가?>
- 경제전쟁의 프레임, 국가•애국주의 프레임의 유혹과 위험

한•일관계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많은 분들이 일본으로의 여행을 취소하거나 일본 상품 구매를 Boycott 하고 있다. 이를 위한 사이트가 만들어지고 앱이 개발되어 홍보되기도 한다. 전국에서 촛불이 하나 둘 켜지고 있고 일본에 대한 항의 성명이 줄을 잇고 있다.

이것은 최근 식민제국의 역사에 대한 반성과 사과도 없이 역사정의를 훼손하며 경제를 무기로 한국 정부에게 일방적인 항복을 강압하는 일본 아베 정부에 대한 정당한 최소한의 표현일 것이다. 일본 아베 정부는 과거 일제 식민지 제국에서 저질렀던 성노예 여성과 강제 동원 징집용 등의 만행에 대해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구나 지난 2019년 3월, 중고교 조선학교에 대한 차별을 합헌으로 결정했고 올해 10월부터 실시할 예정인 '유아 교육•보육 시설에 대해 무상화 정책'에서 조선인 유치원을 제외시키는 등 철저히 재일한인에 대한 배제/고립정책을 고수하거나 강화하고 있다.

그 누가 지금의 일본 아베정부에 대해 분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시민사회단체들도 예정되어 있던 한•일 시민사회 연대 차원의 회의나 교육을 위한 방문도 취소하는 경향을 보이는 등 한•일간의 긴장과 위기는 점차 고조되고 있는 것 같다. 유명 인사들이 항일, 극일, 역사정의를 주장하며 Boycott를 주장하는 것은 이제 일상화된 모습이 되었고, 정부와 정치권에서는 일본과의 싸움을 위해 분열을 해서는 안되며 정부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요청하고 있다.

정치권의 스시, 사케 논쟁에서 보이듯 점차 유치할 정도의 애국주의 팔이 논쟁이 강화되고 있고, 'No Japan', '반일', '극일'이라는 용어는 깨어있는 한국 시민들의 대표 문구가 되고 있다. 서울의 한 지방자치단체가 길거리에 내걸었던 현수막을 다시 떼어내게 한 것도 주최, 형식의 문제일 뿐 내용에 대한 아무런 논쟁도 없이 한국 시민들의 높은 의식을 드러낸 일로 회자되고 있다.

이 틈에 극일과 애국을 위한 기술 경쟁력 강화를 명분으로 노동자들의 노동시간과 임금, 안전에 대한 규제(?), 정책을 되돌리겠다는 자본시장의 반동적인 이해가 철저히 관철되고 있고, 재일 조선인/한인들의 고통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그동안 동아시아 시민사회가 만들어왔던 그나마 약하디 약했던 민에 의한 평화연대의 고리는 사정없이 끊어지고 사라지고 있다.

일본 내 양심적인(?) 평화를 주장해왔던 시민들의 목소리가 드러나는 듯 하지만 실제 약해기만 하고 약화되고 있다. 소수화된 일본 평화시민 세력과의 연대와 협력도 지금은, 아니 최소한 당분간은 안된다는 정서가 강화되고 있다. 한•일간의 경제전쟁 프레임으로 치달으며 일본 극우세력의 '천황제를 중심으로 한 전전 제국체제로의 복귀' 시도에 반대하는 동아시아의 평화 프레임과 이슈, 연대는 시급하지 않은 배부른 소리가 되거나 전면에 등장조차 못하고 있다. 한•일 시민사회와 동아시아 시민사회가 전후 샌프란시스코협약이나 그 부산물인 65년 한•일협정을 머리 맛대고 재검토하는 것은 한가한 일로 치부되고 있다.

한국 시민사회는 지금의 시기를 어떻게 해석하고 무엇을 할 것인가?

비열한 일본과 도덕적인 한국간의 생존을 가를 백척간두의 한•일 경제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부를 중심으로 한 반일•극일의  애국주의 단일대오에 함께하며 허리띠를 자발적으로 묶고 또 한번 노동자들의 희생을 당연시해야할 것인가? 국가간 경제전쟁 프레임에 스스로를 가둘 것인가? 민이 아닌 국가간의 프레임에 빠진 시민사회는 항상 역사에서 반동이 되어 오지 않았던가? 평화가 위기일 때 정부와 민의 역할은 무엇일까? 국가가 만드는 평화가 반드시 민의 평화를 보장하는가?

촛불로 상징된 수 많은 광장에 의해 만들어져 왔던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역사 반동과 회귀를 걱정해야만 하는 이유, 원인은 무엇일까? 또 한번의 촛불이 햇불이 되기를 고대하면서도 갖게 되는 질문이다. 우리는 그동안의 촛불이 무엇이었던가를 물으며 촛불을 들어야 한다. 심각하게 빠져있는 것은 없는지 묻고 찾아야 한다. 광장의 촛불이 한 걸음 진전된 민주/인권의 시민의식과 정의의 역사 그리고 제국에 대한 평화의 촛불을 만들어가기를 원한다면 말이다. 국가권력에 대한 촛불과 함께 시민사회 스스로에 대한 촛불도 함께 밝혀야 한다.

'촛불정부'라는 성립불가능한 명제가 공공연한 지금이,  '촛불'과 '광장'에 대한 질문을 더 이상 늦춰서는 안되는 '때(Kairos)', 시점일 것이다. 우리는 이미 한번 '참여정부'라는 성립불가능한 명칭 앞에서 '참여'가 무엇인지를 묻고 숙고하는 이 '때'를 놓친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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