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MCA 에큐메니컬운동의 선교적 과제
이 윤 희
한국YMCA 생명평화센터 사무국장
* 이 글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90주년 기념 토론회 "한국교회와 국제관계, 그 역사와 변화"에서 발표된 글이다. (2014년 9월 12일(금), 오후 2시 - 4시, 기독교회관 조에홀, NCCK 국제위원회 주최)
최근 몇 년 동안 한국 에큐메니컬운동에 관한 토론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위기’라는 말이 언급된다. 위기를 진단하는 출발점은 다르다 하더라도 이 지적에 대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진단의 출발점이 다양한 만큼 그 처방 또한 제 각 각이다. 이에 비해 위기의 원인과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다양한 지혜를 모으고자 하는 지속적이고 진지한 노력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이에 대한 책임과 헌신을 이야기하고 있는 그룹은 대단히 부족한 것 같다. 서로에 대한 책임 전가 속에서 한국 교계의 미래와 현재를 책임져야 할 청년세대들이 희망을 잃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NCCK가 90주년을 자축하며 새로운 100년과 교회개혁 500주년을 맞이하고 있는 것은 새로운 기회이자 은혜일 것이다. 다시 에큐메니컬운동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젊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푯대를 보여야할 막중한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토론회가 그런 자리의 하나이기를 기대한다.
1. YMCA와 에큐메니컬운동
1) 세계 에큐메니컬운동의 정신적 기초, YMCA 파리기준
- 한국 에큐메니즘의 정신은 무엇인가?
1855년 파리에서 개최되었던 ‘제1차 YMCA 세계회의’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역사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 다른 에큐메니컬운동 단체의 토대를 위한 모델이 된 세계연맹의 기본 원칙인 ‘파리기준’이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하나님이자 구세주로 간주하는 사람들을 함께 모이게 해주는 파리기준의 공식화는 이후 WSCF(1895), YWCA(1898) 그리고 WCC(1948)의 정신적 토대로 사용되어졌다. 파리기준이 에큐메니컬 운동의 성경적 근거와 원칙을 명확히 한 표준 기준의 역할을 한 것이다.
2) 아시아 에큐메니컬운동의 선구자, YMCA
- 한국 에큐메니즘은 한국의 구체성과 아시아 성(性)을 갖고 있는가?
초기 YMCA 운동은 에큐메니컬 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감당해왔다. 특별히 한국과 아시아 지역에서의 에큐메니컬운동의 역사에서 그렇다. 종교적으로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 비(非)기독교적 환경 한 가운데에서 많은 종파와 분파로 나누어진 채 소수자로서 살아가는 아시아 지역에서의 YMCA와 YWCA의 역할은 에큐메니컬운동의 역사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평가되어야 할 대목이다. 교회사 중심의 기독교사는 당시 시대 상황과 이에 응답하고자 했던 에큐메니컬운동의 고민과 역사를 온전하게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아시아에서 초기 에큐메니컬 지도자들은 대부분 YMCA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YMCA는 아시아 성(性)과 아시아의 정체성에 기여한 최초의 단체로 여겨진다.”
YMCA 운동의 지도자들은 외국 선교사들의 일방적이고 독점적인 선교의 실패를 제기하였고 외국인과 원주민과의 주체적인 협력을 강조하였다. 아시아 지역의 특성에 근거한 주체적인 선교운동을 주장한 것이다. 현대 에큐메니컬운동의 시작이라 알려진 1910년 에딘버러 회의에서 행해졌던 인도YMCA 사무총장 V.S. Azariah의 연설은 아시아 에큐메니컬운동의 시작이자 선교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첫 총성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그는 외국 선교사들의 실패를 지적하며 아시아 성(性)에 근거한 에큐메니컬 운동을 주장하였다. 한국 에큐메니즘은 한국의 구체성과 아시아 성(性)을 갖고 있는가? 지난 해 한국에서 개최되었던 WCC 총회는 한국 에큐메니컬 운동의 어두운 그림자를 더욱 분명히 보인 것은 아닐까?
3) 사회와 교회를 잇는 다리이자 열린 창(窓), YMCA
- 한국 교회는 개방적인가?
교회 지도력은 종종 내세 지향적인 경건을 강조하는 온정적인 선교사와 목회자의 손에 항상 좌우되었다. 그들은 신앙심이 충만한 평신도의 역량을 교회 내로 제한시키며 사회적 관심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YMCA는 이러한 헌신적인 평신도들에게 기독교적 활동과 더 넓은 공동체와 국가에 대한 봉사정신과 프로그램을 제공해 주었다. YMCA 지도자들은 몇몇 아시아국가의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YMCA는 특별히 구한말 자주독립과 근대국가의 수립을 열망했던 청년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아시아 지역의 YMCA는 지역적 에큐메니즘과 지역 단체의 필요성에 대해 확신한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4) YMCA의 Mission
미션이해
“우리는 교회의 교의적인 정의에서 보다는 미션 안의 교회를 더욱 중요하게 여기며 이는 개혁자의 전통에서 존재한다. YMCA의 연합의 형태에서 표명된 그러한 미션에 대한 소명에서 우리는 우리의 독특한 미션이 달성될 것으로 본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공동체의 산업, 정치, 지적 생활 그리고 예술, 대중매체, 기타 등등에 참여할 때 지역 공동체에서 분리된 사회 계층에서 우리의 독특한 미션이 달성될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나는 YMCA가 미션 안의 그와 같은 그룹임을 믿는다.”(강문규, 전 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
YMCA의 미션에 대한 토론은 1987년 6차 아시아 YMCA 심화 연구의 참가자들에 의해서 계속 되었고 “YMCA의 미션은 공정하고 인도적인 사회를 계획한다”라고 성명을 발표하였다. 하나님의 왕국을 실현하려는 YMCA의 헌신적 노력과 함께 더불어 공정하고 인도주의적 사회를 구상했는데, 이 사회는 동등한 기회와 공평한 자원 분담의 기초 위에 세워진 사회였다. 하나님의 미션을 위한 YMCA의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향한 정언적인 미션에 전적으로 헌신한다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이었다.
13차 아시아 지도자 회의에서(1991년 3월, 주제 :‘부서진 공동체를 치유하며 지구 돌보기’) 데이빗 서는 YMCA가 하나님의 미션운동이며 기독교 미션이 YMCA가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라고 지적했다. “우리는 YMCA가 미션 단체라고 말함으로써 우리가 의미하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미션을 교회와 종파단체들이 이교도 회원 수를 늘리기 위한 선교 활동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미션으로 이해한다”.
정의와 복지
YMCA의 미션에 대한 이해에서 정의가 계속 강조되어 왔다. 정의는 복지가 아니다. 아시아 태평양Y연맹은 개발과 복지활동의 관여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1976년 치앙마이(Chiang Mai)에서 개최된 ‘개발을 위한 아시아YMCA 계획세미나’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왔다. “YMCA는 세상, 공동체, 문명, 사회 그리고 정치에서 사람의 삶을 운명에 맡겨 놓았으며 더 이상 혼돈 속의 세계와 관련이 없는 복지활동으로 축소되었다”, “YMCA는 사회정의, 경제질서, 정치단체, 문화의 발전이 모두 하나님이 지구에 임재하는 비전에서 각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10년 후 ‘정의와 개발에 관한 아시아 YMCA 포럼’은 정의의 관점에서 아시아의 현실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대부분의 아시아 사람들은 식민지 과거의 영향으로부터 고통을 겪었을 뿐 아니라 착취와 지배의 형태를 띈 신식민지주의의 희생자가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YMCA는 개발에 대한 에큐메니컬 입장으로 ‘정의’와 ‘지역 사람들의 참여’를 강력하게 주장한다.
종교 간의 대화, 교제
쿠알라룸푸르에서 기독교 연구위원회에 의해 수행된 “다른 종교 사람들과의 교제”에 관한 1980년 YMCA 세미나는 YMCA의 종교간 관계 분야에서의 선구적인 활동을 새로운 단계로 이끌었다. 다른 종교인들과의 대화를 위해 YMCA는 독특한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 알려졌다. 제도적인 교회의 구속이 없었고 또한 다른 종교와의 협동의 전통 그리고 다른 종교에 속하는 많은 회원들 때문에 YMCA는 상호교류의 추진력을 주는데 남 다른 능력을 보여주었다. “대화”를 “교제”로 대체한 것은 의도적인 것이었다. “대화”는 서로 서로의 기본적인 헌신노력을 살피고 문제에 대한 신학적, 철학적 해결책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제”는 사람과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다룰 때 대등하게 적극적인 협조를 의미한다. 그 성명서는 다른 종교인과 함께 하는 개방과 교제를 향한 운동이 모든 사람을 염려하는 기독교의 이해심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한국YMCA 목적문
"한국기독교청년회는 젊은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삶을 따라 함께 배우고 훈련하며, 역사적 책임의식과 생명에 대한 감성을 일구어, 사랑과 정의와 평화의 실현을 위하여 일하며, 민중의 복지 향상과 민족의 통일 그리고 새 문화 창조에 이바지함으로써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014년 6월 21일, 제42차 전국대회 및 총회에서 개정)
"기독교청년회는 젊은이들이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함께 배우고, 훈련하며 역사적 책임의식을 계발하고, 사랑과 정의의 실현을 위하여 일하며 민중의 복지 향상과 새문화 창조에 이바지함으로써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이룩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76년 4월 23일, 제 23차 전국대회 및 총회에서 제정)
2. 세계 에큐메니컬운동의 과제
- context를 잃어버린 한국 에큐메니컬, content를 갖고 있는가?
에큐메니컬운동은 오늘의 시대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며 증인의 역할을 새롭게 해야 한다. 한국 에큐메니컬운동이 그 응답에 있는가를 질문해 본다. 한국 기독교는 시대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찾기 위해 그 역할을 감당해왔고 지금 우리에게도 시대를 식별할 의무가 주어져 있다. 우리는 이러한 일을 지금 감당하고 있는가? 시대 인식과 책임을 위해 우리는 다음의 잣대가 필요하다. Text로서 첫째, 성경이다. 둘째, 한국 기독교의 정신과 역사이다. 셋째, 현장에 기초한 시대 인식이다. 정치적, 경제적 분석이다. 한국적 특성과 아시아의 지정학적 국제질서를 의미한다. 또한 우리는 왜 에반젤리컬과 에큐메니컬을 구분하는가를 질문해보면서 세계 에큐메니컬운동에 기여했던 두 분의 문제의식을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WCC 前 사무총장이었던 Konrad Raiser는 21세기 에큐메니컬 운동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냉전 종식이래로 세워진 토대. 첫 번째 난제는 경제적 재정적 세계화의 과정에서 나온다. 이는 특히 2001년 9월 11일 이래로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에서 군사적 우월성을 바탕으로 패권적 일방주의에 열중하는 듯이 보였다. 두 번째 난제는 종교 분야의 근본적인 변화와 공적 분야에서 종교의 재등장과 관련이 있다. 종교 간 만남과 협조는 에큐메니컬 의제의 중심으로 이동할 것이다.”
또 다른 한 분은 WCC 대외협력위원장으로 한국 교회에 많은 기여를 했던 Ninan Koshy의 제안이다. 이를 소개하며 의견을 덧붙이고자 한다.
○ 세계화에 의해 만들어진 시장 사회는 에큐메니컬 운동에 주요한 도전이 된다.
세계화와 그와 관련된 교회와 에큐메니칼 운동을 토론할 때 오직 시장 경제만 고려된다. 아마도 더욱 근본적인 것은 시장 사회로부터의 미션에 대한 도전이다. 경제 세계화가 불의, 불평등 그리고 빈곤을 창출하고 있다. 세계화의 주도적 지지자조차도 좀 더 공정한 세계경제질서 수립의 실패로 세계화는 아마도 내부에 소멸의 씨앗을 지니고 있다고 시인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사는 세계화의 불공정한 결과뿐 아니라 정의란 개념이 세계화하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세계화에는 정의를 위한 ‘공간’이나 ‘영역’이 없다. 세계화 아래서 개발의 패러다임은 오직 성장에 관한 것이다.
○ 에큐메니컬 운동이 일치에 관한 것이라면 세계화는 이에 직접적인 도전이 된다.
“세계적(global)”이란 용어는 주의 깊게 사용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그것은 만물에 동등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것은 ‘국제적(international)’이라는 단어 대신에 점점 사용되고 있으나‘국제적’이지 않다. 국제적은 국가와 국민을 포함한다. 세계적은 국가도 국민도 포함하지 않는다. 에큐메니컬은 국제적 이상이다. 그것은 지구에 거주하는 전부를 언급한다. “세계적”은 에큐메니컬의 두 가지 근본적인 원칙에 반한다. 즉 일치와 정의가 그것이다. “세계적”은 反에큐메니컬이 될 수 있다.
○ 테러와의 전쟁의 주요무대가 아시아라는 사실은 이 지역의 에큐메니컬 단체에 특별한 도전을 준다.
테러와의 전쟁은 아시아에서의 전쟁이고 아시아에 관한 전쟁이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이란과 함께 북한을 “악의 축”에 포함시켰으며 작금의 현실은 시리아와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은 이라크와의 전쟁에서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 번째 규모로 최대의 군대(3,000명)을 파견했다. 아시아는 미국의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으로 부상했다. 미국은 중국과 북한을 제외하고 모든 아시아 나라와 어떤 형태로든 군사적 관계를 맺고 있다. - 동맹, 기지, 시설 사용, 무기거래 등. ‘전략적 동맹관계’의 이름으로 서아시아의 현실의 한반도의 현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종교의 문제로 해석되는 많은 전쟁과 분쟁이 아시아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한국 에큐메니컬 운동이 중요한 이유이다.
○ 에큐메니컬 운동은 아시아에서 새로운 무기경쟁과 군국화에 어떻게 대응하는가?
아시아의 핵무기 전선을 떠올리면 매우 심란하다.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특히 기독교인은 핵무기 소유-핵무기를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고 기꺼이 사용할 것을 함축-를 비판해야 하는데 이는 핵무기가 인류뿐 아니라 창조세계에 대한 위협이기 때문이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주요 관심사로서 핵 무장 해제와 평화를 과제로 삼아야 한다. 핵 발전을 포함한 핵에 대한 신앙의 태도를 말해야 한다. 핵은 기독교 신앙과 양립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반하는 죄임을 고백해야 한다. 후쿠시마는 세상에 보낸 핵 없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증표이다.
○ 제국으로부터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해 전례 없는 도전이 나오고 있다.
제국은 현재 정치적 어휘에서 가장 두드러진 용어이다. 제국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실체이다. 미국의 힘과 관련하여 ‘제국’ 이란 말의 사용은 한때 논란이 있었고 종종 미국의 지배권에 대한 좌파의 비평으로 제한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주류 미디어와 정치 담론에서 제국의 개념이 심지어 “팍스 아메리카나” 용어가 자주 그리고 두드러지게 언급되고 있다. 이스라엘과 한국 등의 국가의 생존을 보장하며 세계 무역과 상업의 바퀴를 굴리고 있는 지금의 미국을 ‘제국’을 제외하고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가? 세계 2차 대전 후 에큐메니컬 운동은 전후 국제질서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대조적으로 에큐메니컬 운동은 새로운 세계질서를 비판해야 하며 이의를 표현하고 정당하고 지속 가능한 세계 공동체의 대안적 질서를 계획해야 한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제국주의적 지배 프로젝트에 맞서야 한다. 전쟁의 불가피성과 영속성 이론을 명확히 거부해야 할 의무가 있다. 팔레스틴과 한반도는 지정학적 패권질서의 핵이다.
○ 제국의 신학은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미국의 제국주의 역할 지지자들은 항상 국가를 위한 특별한 미션을 주장한다. “꼭 필요한 국가”, “예외 국가”와 같은 표현은 정치적인 글에서 흔히 나온다. 신학자들은 미국이 신의 도구인지 혹은 미국이 신 자신이 되기를 주장하는지의 문제를 제기한다. 아프가니스탄에 맞서는 군사작전 명은“무한한 정의 작전”이었는데 이는 십자군과 같은 의식이다. 제국은 종교를 필요로 한다. 제국은 항상 보편적 믿음과 개념에 호소함으로써 그들 자신을 정당화 시키고자 한다. 이러한 믿음은 제국적 성공에 요구되는 사회적 응집력을 제공하며 궁극적으로 종교적 믿음이어야 한다. 제국은 신을 필요로 한다.
“모든 레벨에서의 지배 욕구, 특히 제국적 레벨에서의 지배 욕구는 목적의 도구로써 가장 다양하고 모순적인 종교적 충동과 철학을 사용할 수 있다.”(Reinhold Niebuhr, 1959, ‘국가와 제국의 구조’)
○ 에큐메니컬 운동은 이와 관련하여 많은 신학적 이슈를 다루어야 한다.
종교는 국가적, 국제적으로 정치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으며 종교 간 관계는 새로운 중요성을 띄게 되었다. 테러와의 전쟁에서 새로운 상황이 등장했다. 많은 사람들은 9월 11일 공격을 “이슬람 테러”로 묘사한다. 그에 대한 응답이 “십자군”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부시 대통령이 테러에 맞서는 초기 단계에서 사용된 어구이다. 이슬람교도의 대다수는 아시아에 산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이슬람교인을 가진 나라는 인도네시아이고 두 번째는 인도이다.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말레이지아는 다수의 이슬람 인구를 가지고 있다. 이슬람교에 대한 서구의 개념은 “석유가 있는 중동”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한 상황은 아시아 기독교인에 대해 특별한 요구를 하게 한다. 즉 이슬람교에 대한 더욱 큰 이해와 이슬람교 이웃에의 조심스러운 접근을 필요로 한다.
3. 한국 에큐메니컬운동의 과제
○ 에큐메니컬운동이 존재하는가?
한국 에큐메니컬 운동은 방향을 잃고 있다. 아니 ‘에큐메니컬운동이 존재하는가?’ 질문하게 된다. 지금 누가 이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가를 자문한다. 한국 기독교의 미래는 있는가? 빛과 소금의 작은 집단이 아닌 이미 성장과 성공의 상징이 되어 버린 한국 교회, 교권과 분열, 패권과 성장, 부패와 목회자 중심의 중세 카톨릭으로 전락하지 않았는지 질문하고 있다. 교회 안팎의 질문이다. 교회를 버티고 있는 기독 청년들의 질문이다.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 한국 기독교는 어디에 있는가? 제국의 신학, 정복의 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
에큐메니컬운동은 국가 권력과 제도에 의한 변화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인 한 사람의 변화를 추구하는 인간혁명운동이다. 제도의 변화로만 궁극적 질서에 도달할 수 없다. 따라서 자유에 도달하기 위한 공동체적 인간의 끊임없는 훈련을 강조한다. 개인의 내적 혁신과 사회 혁신이 구분되지 않으며 통합적이고 총체적인 이해를 추구한다. 에큐메니컬운동은 신, 구교의 일치와 연합이라는 서구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상과 이웃 종교 그리고 모든 만물의 상생과 생명의 일치로 확장되고 있다. 일치는 내 안에서 타자를 찾지 않고, 타자 안에서 나의 모습을 찾는 것이다.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다. 다양성 안에서 찾는 일치다. 한국 기독교는 어디에 있는가? 제국의 신학, 정복의 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
○ 현대 기독교는 새로운 문명과 질서를 만드는 과정에서 무슨 답을 할 수 있는가?
세상은 물질만능의 경쟁과 불안한 삶으로 사람들을 몰아가며 공동체적 인간의 몰락을 재촉하고 있다. 모든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내몰며 법인격(개인)의 자유를 위한 국가 기능은 강화되고, 구체적인 한 인간(개인)의 자유를 위한 기능은 축소된다. 이로 인해 초국적인 군산복합체와 기업(법인격으로써 개인)의 지배질서는 더욱 강화되고 약자인 개인(사람)은 흩어지고 불안한 존재가 된다. 19~20세기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생산력주의라는 공통의 기반을 갖고 있다. 이성과 과학의 이름으로 자연 생태계를 공존과 상생의 터전이 아닌 인간의 이용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서구 제국에 의해 빈곤과 절망의 땅으로 전락한 3세계는 자신과는 무관한 행동의 결과로 고통받고 있으며 그 격차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세계는 일국에서 세계로, 인간의 문제에서 지구의 문제로 확장되고 있다. 제도와 시스템에서 삶의 질서와 문명의 문제로 넓어지고 있다. 이에 대해 서구 자본주의는 그 해답을 과학기술로부터 찾고 있다. 그 결과 인류는 지금, 생존 가능한 지구의 미래를 염려하고 있다. 또한 현대 문명에 기초한 삶의 질서를 바꿀 수 있는 가치와 시스템을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현대 기독교는 새로운 문명과 질서를 만드는 과정에서 무슨 답을 할 수 있는가?
○ 생명과 정의, 평화는 한국 교회, 어디에 있는가?
기독교의 시작인 야훼신앙은 노예들의 고백이다. 이집트 노예들의 해방에 대한 염원이자 찬미이다. 가족과 고향을 잃은 포로된 자들의 절망과 희망의 노래다. 국가 없는 해방자들의 자기 통치를 위한 질서이자 정신이며 훈련된 이들의 신앙이다. 예언자들은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고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위해 죽기까지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했던 이들이다. 기독교는 세상의 질서와 다른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주권으로 살고자 하는 이들의 희망의 노래다. 국가가 없는 이들의 삶의 질서이자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구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치유와 위로이자, 지치고 상처받은 세상 만물의 절망의 외침이자 희망의 찬가다. 사랑과 평화 그리고 생명을 향한 고백이다. 세상의 평화와 다른 하나님의 평화를 노래한다. 지난해 한국에서 개최되었던 WCC 10차 총회의 주제였던 생명과 정의, 평화는 한국 교회, 어디에 있는가?
○ 한국YMCA 에큐메니즘의 이해
한국 기독교는 이집트 노예들과 바벨론의 포로들로부터 시작하여 로마제국의 갈릴리 민중들에 의해 세상과 다른 하나님나라의 주권과 질서가 선포되고 국가를 잃은 조선 민중에게 희망으로 피어난 운동이다. 한국 기독교는 정신사적 맥락은 이처럼 일제 식민지 조선 민중의 해방에 대한 열망(Context)과 히브리 노예들의 해방 전통(Text)이 맞닿아 있다.
한국YMCA 에큐메니컬운동은 이와 같은 사상적 전통을 이미 잉태하고 있으며 종교적 영역의 일치로만 제한되거나 갇히지 않는다. 세상과의 일치, 온 만물 우주와의 상생을 말한다. 또한 에큐메니컬운동은 지금의 세계가 제기하는 지구 시민사회의 문제를 해결해 가기 위한 기본 태도이자 정신이며,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세상의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응답이다. 이처럼 에큐메니컬은 강자의 윤리가 아닌 약자의 자리에서 울려 퍼지는 생명의 울림이자 연대의 몸부림이며 예수운동의 핵심적 복음이다. 약자가 말하는 정의이자 평화이며 생명이다. 사랑이다. YMCA운동은 복음적 전통에 기초한 에큐메니컬운동의 시작이었다. 복음과 에큐메니컬은 구분되거나 양립되지 않는다. 하나다. 이것을 구분하는 것은 하나님을 가르고 구분하는 것이며 자신의 이해를 투영하는 것 이외에 다름 아니다.
○ 세계 교회에 대한 한국 교회의 기여
그리스도는 상생의 에큐메니컬 정신으로 우리를 자연스럽게 인도한다. 권력이 주는 세상의 질서가 아닌 인간혁명을 꿈꾼 '하나님 나라의 영성', '가나안 여정의 훈련', 이것이 에큐메니컬운동의 정체가 아닐까? 에큐메니컬 정신의 본연을 찾아가는 운동은 한국 기독교의 혁신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지구 시민사회의 변혁적 영성, 사회적 영성을 공유하는 기초가 될 것이다. 기도와 연구, 나눔과 실천의 전통은 우리가 갖고 있는 소중한 자원이다. 세계 교회에 공헌하는 한국 교회의 역할은 다시 에큐메니컬운동을 이야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을까?
○ 한국 에큐메니컬 운동은 하나님의 통치 질서를 만드는 생명과 정의, 평화의 도구이어야 한다.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에 공헌하는 것은 이 질서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제국의 선교가 아닌 약자의 평화,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다. 한국 교회의 역사와 전통은 이를 증명하고 있으며 한국 교회가 제국의 신학, 정복의 질서가 아닌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른 예수의 평화를 말할 수 있는 증인이다. 한국YMCA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핵 없는 세상’, ‘팔레스타인과 한반도의 평화협력운동’, ‘평화페다고지(교육)’, ‘청년 지도력의 육성’, ‘마을과 생활에서의 협동’을 중심 과제로 제안하고 있다.
4. YMCA 에큐메니컬운동은 세상과 교회의 교차로
세계의 문제들은 기독교적 응답을 요구하는 기독교인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류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에큐메니컬운동은 정의, 평화, 인권, 생태 등 어떤 문제이든 간에 종교와 국가 그리고 문화의 경계를 가로 질러 일해야 한다. 그것은 신학적인 질문이자 기독교의 존재에 대한 본질의 질문이다. 무엇이 에큐메니컬인가 그리고 누가 에큐메니컬 운동을 구성하는가 등 우리의 이해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기독교는 “잃어버린 자, 가장 적게 가진 자, 마지막 남은 자”(M.M.Thomas)의 필요성에 귀 기울이며 변화하는 세계의 특성에 비판적으로 개방적이다. 에큐메니컬운동은 항상 세속과 관련을 맺으며 노출되어 있고 세상과 교회 사이의 교차로 위에 있다. 그 교차로 위에 세상에 보는 교회의 창으로, 다리로 YMCA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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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있는 평화의 협력', 팔레스타인 올리브트리캠페인 (0) | 2021.10.05 |
한국전쟁 71년, 2021 고양YMCA 평화메시지 - ‘상생대동(相生大同)’의 ‘민(民)이 만드는 평화’를 일구는 고양!!! (0) | 2021.06.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