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주의의 승리는 곧 인간성의 몰락을 부르고, 지배하는 곳마다 인간의 본질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우리 시대의 선과 악이 너무나 교묘히 얽혀 있다는 것이다'
'정치•사회적인 문제와 경제적 고통이 인간적인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을 때 전체주의는 다시 나타나, 그들을 강하게 유혹할 것이다'
한나 아렌트의 표현인데, 금융과 군사자본에 의해 획일적으로 지배되는 탐욕의 체제와 그들의 이해에 충실히 복무하는 정치와 그 떡고물에 기생하는 부패한 지식인 사회. 불의와 부패, 일방적 착취구조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 이에 반대하는 것이 월가로 상징되는 '내가 99%다'라는 점령운동일 것이다.
부자들만의 세상을 위해 그리고 그들의 충견으로 탐욕스럽게 사익을 추구하는 부패한 권력은 사익을 위해 권력을 남용하고 그들의 언어와 사회의 언어가 다름을 전혀 알지 못한다. 희망의 끝자락을 놓치고 절망의 언어를 배우기 시작한 사회는 전체주의의 유혹에 빠지기 쉽고 기생과 무임승차의 문화가 내면화되고 폭력의 질서가 당연의 사회가 되고 만다.
한국 사회에 보이는 정부의 폭력적 질서와 사익을 위한 공의의 공공연한 파괴는 이미 경제적 수준과 권력의 크기로 사람의 모든 것이 재단되는 불행의 터널에 진입해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가 아닐까?
이미 자본에 의해 획일화된 자발적 경제적 노예의 삶을 유일한 삶의 모양으로, 경쟁을 통한 물질적 부와 권력의 크기가 살아가는 유일한 잣대가 된 한국사회는 정치권력의 독재나 전체주의보다도 더 오염되고 치유가 어려운 사회가 된 것이 아닐까? 이미 우리 스스로 자본의 요구에 순응하거나 적응하며 성공신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삶의 자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성공신화는 어디에서든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든 타인(?)을 위한 것이든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승리하기 위해 나와 타인의 행복을 짓밟는 경우를 보게된다.
이처럼 선악이 공존하는 삶의 모양에서 새로운 대안의 싹은 어디로부터 만들어질 수 있을까? 과거 독재정권을 극복하기 위해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사람들에게는 분명한 적이 보였고, 그것에 결연히 타협하지 않았던 삶의 정당성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선악이 내 안에 공존하고 있고, 분명한 적 또한 있는 인식하기 쉽지 않게 되었다.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
한국이 시끄러울 수 밖에 없는 이유를 깨닫지 못하는 이가 권력의 정점에 있는 이상 그 사회는 어두운 불행의 터널로 더 깊숙히 들어갈 수 밖에 없다. 이를 시급히 교정해야한다. 다만 그것이 몇몇의 인적구조의 교체로 가능하다는 믿음은 환상에 불과하며 궁극적으로 새로운 질서를 꽃 피울 수 없다. 당장의 어려움을 해결학자 눈에 보이는 쉬운 길로 모두가 몰려간다면 변화의 뿌리를 스스로 뽑아내는 일이 된다. 아직도 자신의 삶 안에 있는 선악을 보지 않고 오로지 밖의 악만을 고집한다면, 언젠가 나의 거울에서 또 다른 악의 모습을 발견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정치권력의 역할을 교정하고 변화시키기 위한 개인적, 집단적 노력은 지금도 대단히 소중하고 어려운 여정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현실이고 정답인 듯 말해지는 것은 대단히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큰 강물은 작은 샛강과 여울들이 모여들고 그러면서도 잔잔히 융합하며 흐르는 힘이 있다. 당장 불어오는 바람에 출렁이는 샛강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양 야단법석이어서는 안된다. 고요히 있는 강물과 바다를 보며, 그것의 흐름을 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 정치권력의 문제 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이 한 발씩 담그고 있는, 소수에게 집중된 경제권력에 대한 치유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늦지만 그리고 앞이 잘 보이지 않지만, 가야할 길은 시민들 스스로의 자치권력과 협동의 경제 그리고 깊은 성찰의 문화를 확대해 가는 일일 것이다.
http://www.facebook.com/yunheepage
'정치•사회적인 문제와 경제적 고통이 인간적인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을 때 전체주의는 다시 나타나, 그들을 강하게 유혹할 것이다'
한나 아렌트의 표현인데, 금융과 군사자본에 의해 획일적으로 지배되는 탐욕의 체제와 그들의 이해에 충실히 복무하는 정치와 그 떡고물에 기생하는 부패한 지식인 사회. 불의와 부패, 일방적 착취구조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 이에 반대하는 것이 월가로 상징되는 '내가 99%다'라는 점령운동일 것이다.
부자들만의 세상을 위해 그리고 그들의 충견으로 탐욕스럽게 사익을 추구하는 부패한 권력은 사익을 위해 권력을 남용하고 그들의 언어와 사회의 언어가 다름을 전혀 알지 못한다. 희망의 끝자락을 놓치고 절망의 언어를 배우기 시작한 사회는 전체주의의 유혹에 빠지기 쉽고 기생과 무임승차의 문화가 내면화되고 폭력의 질서가 당연의 사회가 되고 만다.
한국 사회에 보이는 정부의 폭력적 질서와 사익을 위한 공의의 공공연한 파괴는 이미 경제적 수준과 권력의 크기로 사람의 모든 것이 재단되는 불행의 터널에 진입해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가 아닐까?
이미 자본에 의해 획일화된 자발적 경제적 노예의 삶을 유일한 삶의 모양으로, 경쟁을 통한 물질적 부와 권력의 크기가 살아가는 유일한 잣대가 된 한국사회는 정치권력의 독재나 전체주의보다도 더 오염되고 치유가 어려운 사회가 된 것이 아닐까? 이미 우리 스스로 자본의 요구에 순응하거나 적응하며 성공신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삶의 자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성공신화는 어디에서든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든 타인(?)을 위한 것이든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승리하기 위해 나와 타인의 행복을 짓밟는 경우를 보게된다.
이처럼 선악이 공존하는 삶의 모양에서 새로운 대안의 싹은 어디로부터 만들어질 수 있을까? 과거 독재정권을 극복하기 위해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사람들에게는 분명한 적이 보였고, 그것에 결연히 타협하지 않았던 삶의 정당성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선악이 내 안에 공존하고 있고, 분명한 적 또한 있는 인식하기 쉽지 않게 되었다.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
한국이 시끄러울 수 밖에 없는 이유를 깨닫지 못하는 이가 권력의 정점에 있는 이상 그 사회는 어두운 불행의 터널로 더 깊숙히 들어갈 수 밖에 없다. 이를 시급히 교정해야한다. 다만 그것이 몇몇의 인적구조의 교체로 가능하다는 믿음은 환상에 불과하며 궁극적으로 새로운 질서를 꽃 피울 수 없다. 당장의 어려움을 해결학자 눈에 보이는 쉬운 길로 모두가 몰려간다면 변화의 뿌리를 스스로 뽑아내는 일이 된다. 아직도 자신의 삶 안에 있는 선악을 보지 않고 오로지 밖의 악만을 고집한다면, 언젠가 나의 거울에서 또 다른 악의 모습을 발견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정치권력의 역할을 교정하고 변화시키기 위한 개인적, 집단적 노력은 지금도 대단히 소중하고 어려운 여정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현실이고 정답인 듯 말해지는 것은 대단히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큰 강물은 작은 샛강과 여울들이 모여들고 그러면서도 잔잔히 융합하며 흐르는 힘이 있다. 당장 불어오는 바람에 출렁이는 샛강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양 야단법석이어서는 안된다. 고요히 있는 강물과 바다를 보며, 그것의 흐름을 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 정치권력의 문제 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이 한 발씩 담그고 있는, 소수에게 집중된 경제권력에 대한 치유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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