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에큐메니컬운동 총 평가
: 100주년을 맞이하는 자세
안재웅 한국YMCA전국연맹유지재단 이사장
이 글은 2024년 2월 26일-27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2024년 에큐메니컬 정책협의회’에서 발표된 기조발제의 전문으로, 「기독교사상」 2024년 4월호에 실렸습니다. 안재웅 이사장님께 허락을 구해 공유드립니다.
1. 올해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 NCCK)는 창설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교회협의 전신인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1924년에 장로교회, 두 감리교회, 장로교와 감리교의 여섯 선교회, 성서공회, 중앙기독청년회연합회(YMCA)가 함께 만든 에큐메니컬 교회협의체이다. 그 후 1931년부터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로 명칭을 바꾸어 1937년까지 존속하다가 일제의 강압으로 해산되었다. 일제는 1938년 어용단체인 조선기독교연합회를 조직하여 친일 정책을 펼치다가 1945년 해방을 맞이하였다. 마침내 1946년, 해체되었던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를 계승해 한국기독교연합회로 재건하여 활동해오다가 1970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로재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교회협의 전신인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는 규칙을 제정하고 피차 교회 간에 ‘성경과 정치와 예배 모범과 규칙’은 간여하지 못하도록 규정하였다. 다만 협동하여 복음을 전파하고 사회도덕의 향상을 꾀하여 기독교 문화의 보급을 계도(計圖)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분명한 사실은 설립 당시의 공의회는 “교리는 갈라졌지만 봉사는 함께 한다.”(doctrine divides, service unites)라는 에큐메니컬 정신을 기본 원칙으로 삼았다는점이다.
3. 1919년 3·1독립운동을 겪으면서 많은 교회 지도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인명의 피해를 입었다. 또한 많은 교회가 불타고 파손되는 아픔을 겪었다. 순교자들의 고귀한 희생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역사의식을 고취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자발적으로 3·1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교인들의 숫자가 한동안 증가하다가 점차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게 되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3·1운동과 무관하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심지어 이들은 “우리에게는 귀띔도 해주지 않았다.”라는 말로 발뺌하였다. 감리교의 웰치(Herbert Welch) 감독은 “3·1운동 당시 어떤 곳에서는 독립 선언서가 교회당에서 낭독되었는데 이는 불행한 일이었으며 태황제 봉도식 후에 교회 건물에서 독립 시위를 한 것은 잘못이었다.”라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마침 캐나다장로회 해외선교부의 암스트롱(A. E. Amstrong) 총무가 한국을 방문한 후 귀국 보고회에서 선교사들이 얼마나 친일적이었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였다. 이것이 조선 그리스도인들이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를 설립하게 된 배경이다.
4. 당대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사회선교운동, 청년학생기독교운동, 농촌운동, 절제운동, 문맹퇴치운동, 문서선교운동, 교육 및 의료사업 등을 통해 기독교진흥운동을 펼쳤다. 골방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 시대적 사명을 다하려는 각오를 공의회를 통해 이루고자 하였다. 하지만 1926년 10월, 조선주일학교대회가 열렸을 때 한양청년연맹이 노골적으로 ‘반기독교대회’와 ‘반기독교강연회’를 개최하여 훼방하려 하였다. 또한 교계는 근본주의자와 진보주의자 간의 갈등,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사회복음주의와 위기신학의 발흥, 지역주의와 국제주의 및 적극신앙단 등으로 신학적인 혼선을 겪게 되었다.
5. 이런 가운데 1932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사회신조’를 선언하였다. 사회신조는 교회의 기본적인 신앙생활 외에도 인류의 평등, 인종과 성별 등의 차별 금지, 아동의 인격 존중과 노동 금지, 노동자의 권익 보호, 최저임금법과 같은 사회 안전망 설치, 소득세와 상속세에 높은 세율과 누진세 실시 등을 두루 담아 발표하였다. 포괄적이면서도 당면한 사회문제의 해결을 염원하는 내용을 요약한 선언이다.
6. 1950년대에는 한국장로교가 셋으로 분리되는 아픔을 겪었다.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단정하고 저항한 연유로 많은 교역자들과 신도들이 투옥되었다. 주기철과 박관준 등 50여 명이 순교하였다. 광복 이후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던 17명의 신사참배 항거자들이 출감하였는데 이들을 출옥성도라 불렀다. 그들 중 주남선, 한상동, 이인재 등은 신학교 설립 기성회를 조직하였다. 1946년 9월, 박윤선을 교장대리로 하여 부산에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대한예수교장로회는 고려신학교 설립자들을 독선주의자라면서 멀리하고 총회 총대로도 받아주지 않았다. 이들에게 ‘고려파’라는 명칭이 주어졌다. 결국 1952년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총노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두 번째 분립은 조선신학교 설립으로 1953년 대한예수교장로회로부터 독립한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이다. 기장은 진보적인 신학 노선을 견지하면서 국내외적으로 에큐메니컬운동을 견인해오고 있다. 세 번째 분립은 1959년 대전 중앙교회에서 회집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4회 총회로 에큐메니컬 측과 복음주의협의회(NAE) 측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분열의 빌미 중 하나는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용공이라 비난하며 탈퇴를 주장한 NAE 노선 추종자들의 처신 때문이다. 결국 총회는 정회하였는데, 정회에 불만을 품은 회원들은 다음 날 서울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속회하였다.(통합) 정회했던 총회는 11월 서울 승동교회에서 속회, WCC 탈퇴를 결의하였다.(합동) 통합 측은 합동 측과 연합하기 위해 1962년 WCC를 탈퇴했다가 1969년 제54회 총회에서 WCC 회원교단으로 복귀하였다.
7. 1951년, 교회 지도자들은 부산에서 기독교연합전시비상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한국전쟁의 부당성과 그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 한편 전쟁의 종식과 긴급 구호를 호소하였다. 또한 전쟁난민 구호 활동과 파괴된 시설의 복구를 위해 세계교회가 협력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많은 구호물자가 세계교회로부터 답지하였다.
8. 1974년에는 NCCK 인권위원회를 조직하여 맹활약하였다. 이 기구는 인권센터로 성격을 바꾸어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해마다 수여하는 ‘인권상’은 NCCK의 상징성을 보여주고 있다. 구속자 석방과 민주화를 촉구하는 목요기도회는 시대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자리가 되었다. 늘어나는 구속자들로 인해 구속자가족협의회가 조직되어 시대의 아픔을 보듬는 일을 하였다. 그 밖에 선교대책위원회가 잠정적으로 만들어져 종교의 자유를 박탈하려는 당국의 시도에 정면 대결하였다. 김관석 총무의 탁월한 지도력 덕분이다.
9. 1973년 4월 남산부활절연합예배 때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 위원장인 박형규 목사는 젊은 성직자들과 기독학생들을 통해 당국의 폭정을 알릴 요량으로 플래카드와 전단지를 돌린 것이 빌미가 되어 구속되었다. NCCK는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관련자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은 유신정권에 대한 날 선 비판을 하며 한국 그리스도인의 시대적 사명을 명쾌하게 제시하였다. 1974년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젊은 성직자들이 구속되었다. 긴급조치 제4호 위반으로 민청학련 사건이 터져 많은 학생들과 민주인사들이 구속되었다. 특히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관련 학생들과 실무자 그리고 여러 지도급 인사들이 구속 기소되어 수형생활을 하였다. 3·1명동민주구국선언과 민주구국헌장 사건으로 민족의 지도자들이 구속되는 사태가 이어졌다. 1979년 11월에는 서울YWCA강당에서 개최된 대통령 직선제 요구 시위, 일명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민주인사들이 대거 구속되었다. 이런 시국 사건의 변론을 위한 변호인단을 꾸린 것도 NCCK 인권위원회였다. 1970년대 유신체제를 현장에서 경험하던 산업선교, 학원선교, 빈민선교 소속 실무자들과 젊은 성직자 그룹이 상호 강력한 연대를 통해 힘을 구축하면서 민주화운동을 하였다. 크리스챤아카데미는 대화(Tagung)라는 독특한 방법으로 각계의 정상급 인사들을 모아 현안을 조율하였다. 또한 중간집단 교육을 통해 민중의 힘을 구축하는 새로운 모델을 시도하였다.
10. 1988년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교회 선언(88선언)은 역사에 길이 남을 문건으로 평가된다. 88선언은 남북한이 1972년 합의한 〈7·4 남북공동성명〉의 정신에 입각하여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통일의 3대 원칙을 존중하면서 한국교회의 선교적 방향을 다섯 가지로 제시하였다. 첫째, 민족 자주의 원칙, 둘째, 인도주의의 원칙, 셋째, 민족 대단결의 원칙, 넷째, 민주적 참여의 원칙, 다섯째, 평화의 원칙이다. 교회협은 이렇게 통일 논의에 물꼬를 트는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1. NCCK는 에큐메니컬 국제기구들과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28년 국제선교협의회(IMC) 대회가 예루살렘에서 개최되었을 때 한국 대표들이 참석하였다.(신흥우, 양주삼, 정인과, 김활란과 노블 그리고 마펫) 이 대회를 마친 후 신흥우와 김활란은 덴마크를 방문하고 농촌운동을 집중적으로 견학하였다.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WCC) 창립총회가 암스테르담에서 열렸을 때 김관식과 엄요섭(청년대표)이 총대로 참석하였다. 1990년에는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 JPIC) 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하였고 2013년 부산에서 WCC 제10차 총회를 개최하였다. 한국의 회원 교단은 모든 총회에 총대들을 파송하였다. 또한 WCC 회장단, 중앙위원과 실행위원 그리고 여러 프로그램위원회 위원과 실무자들이 탁월한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12. 1957년 프라팟에서 개최된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의 전신인 동아시아기독교협의회(EACC) 창립 준비 회의에도 한국 대표들을 파송하였다.(전필순, 계일승, 박병훈, 유호준, 송정률, 김활란) 그리고 2년 뒤 창립총회가 쿠알라룸푸르에서 모였을 때 총회 총대를 파송하였다.(한경직, 류형기, 양화석, 김삼대, 배민수, 유호준, 박태화) 1985년 서울에서 제8차 총회를 유치하여 무난하게 마쳤다. 여러 분야의 프로그램위원회를 초치해서 에큐메니컬협의회를 주관하였다. CCA의 모든 총회에 총대를 파견하였다. 지도력의 측면에서도 회장단과 임원, 각종 프로그램위원회 위원과 실무책임자인 총무 그리고 실무자들을 배출하였다.
13. 1984년 10월 일본 도잔소에서 WCC가 CCA 그리고 NCCK와 함께 한반도 평화통일을 모색하는 에큐메니컬협의회를 주최하였다. 주제는 “동북아시아의 정의와 평화”라고 내걸고 실은 한반도의 평화통일에 관해서 논의하였다. 그 결과 도잔소 에큐메니컬협의회는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화해의 복음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둘째, 평화통일은 남 측 교회만의 선교 과제가 아니라 남과 북 교회 공동의 과제임을 밝힌다. 셋째, 통일은 남과 북은 물론 세계교회의 공동 책임이며 지금까지 북조선을 고립시키는 정책에서 벗어나 세계교회들이 북조선의 교회를 방문함으로써 한반도의 통일을 함께 지원할 것을 다짐한다. 도잔소 협의회는 남과 북의 교회는 물론 세계교회가 모두 함께 다음과 같은 일들을 주도적으로 추진해나가기로 합의하였다. 첫째, 이산가족에 관하여 인도적인 관심을 갖는 일, 둘째, 통일에 관한 토론이 대중적으로 번져나갈 수 있도록 적극 참여하는 일, 셋째, 상호 적(敵)이라는 이미지를 극복하는 일, 넷째, 청년과 여성들이 정의와 평화를 위한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토록 권장하는 일, 그리고 다섯째, 군비경쟁을 막는 일 등이다. 도잔소 20주년 협의회를 같은 세 기관이 주최하여 2004년 같은 장소에서 개최하였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KCF) 위원장 강영섭 목사는 5명의 대표단과 함께 참석하였고 NCCK에서는 백도웅 총무를 비롯한 여러 명의 교계 지도자들이 참석하였다. 도잔소 30주년협의회는 2014년 스위스 보세이 에큐메니컬 인스티튜트에서 열렸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위원장 강명철 목사가 4명의 대표와 함께 참석하였다. NCCK는 김영주 총무를 비롯한 여러 교단 대표들과 기관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1986년에는 WCC가 제1차 글리온 협의회를 주최하여 남북의 교회 지도자들이 분단 이후 처음으로 만났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서기장 고기준 목사는 4명의 대표단과 함께 참석하였고 NCCK에서는 김소영 총무가 한국교회 대표단과 함께 참석하였다. 특별히 남북교회 대표가 공동으로 성례 의식을 집전하였다. 글리온 모임은 1988년과 1990년 세 번 열렸다. 세 번째 모임에는 NCCK 권호경 총무가 한국교회 대표단과 함께 참석하였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에서는 고기준 서기장이 세 번 모두 참석하였다. 글리온 협의회는 8·15 직전 주일을 남북평화통일 주일로 세계교회가 함께 지킬 것을 결의하고 NCCK와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이 공동 작성한 기도문을 WCC가 전 세계교회에 배포하였다. 도잔소 협의회는 남과 북의 교회 대표들이 상호 방문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도잔소 협의회의 결실은 한반도에큐메니컬포럼(EFK)이란 형태로 에큐메니컬 파트너들이 주기적으로 만나 현안을 조율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14. 1950년대에는 교계 일각에서 벌어지는 사이비 논쟁으로 어수선하였다. 한국기독교연합회는 1955년, 통일교와 박태선 장로가 이끌던 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를 사이비운동으로 규정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960년대에는 박정희 군부가 5·16쿠데타로 권력을 잡았을 때 민정 이양의 약속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한일협정 반대 성명과 박정희 3선 개헌 반대 성명을 발표하였다. 유신헌법 철폐를 주장하는 성명도 시의적절하게 발표하였다. 유신철폐와 민주화운동을 펼치다가 구속된 민주학생 청년들과 민주구국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성명서 및 기도회를 주관하였다.
15. 로마가톨릭교회는 교황 요한 23세의 주관으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를 개최하고 신·구교 간의 협력을 해가기로 다짐하였다. 이런 결과로 바티칸과 WCC가 선정한 신학자들은 공동신학위원회를 결성하고 교회의 일치를 위한 성서연구 자료와 기도문을 만들어 각국에 배포해오고 있다. 한국에서는 1966년 초동교회에서 신·구교 연합기도회에 150여 명이 참석하여 예배를 드렸다. 그 후 신·구교 간 강단을 교차해 가면서 1월 셋째 주간을 기도주간으로 지키고 함께 연합예배를 드리고 있다.
16. 남과 북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노력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한반도의 분단으로 야기된 긴장과 대결은 모두가 나서서 풀어야 할 과제이다. NCCK는 화해와 용서가 첫걸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런 과제를 화해와 통일위원회가 맡아 열정을 쏟고 있다. 요즈음 남북 관계가 점점 적대적으로 치닫고 있다. 국제적인 연대가 시급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하겠다.
17. 교회협의 100년은 잘한 일과 못한 일이 뒤섞여 있다. 일제와 손잡았던 친일 인사들이 있는가 하면 독재자들의 앞잡이 노릇을 한 친정부 인사들도 허다하다. 부끄러운 일이다. 일제청산이 안 된 것처럼 독재 청산도 멈춰 서 있다. 교회협은 공의회로 출발하였다. 소속 교단과 기관에서 파송받은 대표들은 공공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부단히 협의한 뒤 공통분모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래야 교회협의 정체성이 돋보일 것이다. 이런 노력 없이는 밝은 미래를 기대하기 어렵다. 유능한 인물을 구인하여 일을 맡기는 일도 당면 과제이다. 튼튼한 재정의 자립도 해결해야 한다. 국제적인 연대도 강화해야 한다. 우수한 지도력 개발에도 힘써야 한다.
18. 에큐메니컬 운동을 발전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은 영역을 강화해야 한다. (1) 신학의 내실화, (2) 조직의 활성화, (3) 운동의 특성화, (4) 윤리의 생활화, (5) 참여의 보편화, (6) 재정의 자립화, (7) 인재의 저변화이다. 또한 에큐메니컬 운동의 당면 과제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1) 교회의 일치와 갱신을 주도하는 운동, (2) 해방의 복음을 선포하는 운동, (3) 정의와 평화를 이룩하는 운동, (4) 화해와 치유를 이루어가는 운동, (5) 생명과 환경을 살리는 운동, (6)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등을 솔선수범하는 운동, (7) 바닥공동체를 튼튼하게 만드는 운동, (8) 돌봄의 선교를 실천하는 운동, (9)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가는 운동, (10) 상황신학을 발전시키는 운동 등이다. 또한 에큐메니컬 운동의 방점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1)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기, (2) 생명의 존중, (3) 폭력의 배제, (4) 갈등의 해결, (5) 복음의 선포, (6) 정의와 평화의 증진, (7) 인권의 보호, (8) 보편적 가치의 보전이다.
19. 지난 100년 동안 축적해온 에큐메니컬 운동의 결실은 매우 크다.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기억하게 된다. 신학적인 기여도는 놀랄 만큼 크다. 교회협의 지난 100년은 아날로그 시대였다. 하지만 오늘의 시대는 디지털 시대로 인공지능(AI)과 첨단과학이 인류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들고 있다. 환경파괴와 기후변화로 지구는 자정능력을 잃고 있다. 핵무기의 위협으로 인류는 불확실한 미래를 살아야 한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하고 운동의 이념과 틀을 재정비해야 한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종교는 인간과 더불어 있게 마련이고 교회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필요성을 점점 더 인식하게 될 것이므로 에큐메니컬 운동의 미래가 그리 어두운 것만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20. 교회협은 에큐메니즘 본래의 어원처럼 오이코스, 즉 100년이 된 집(oikos)이다. 이 집을 드나드는 모든 사람이 한 식구처럼 살아가는 아름다운 터전이다. 이제 100년이 된 집을 수리할 때가 되었다. 시대에 맞는 매력적인 리모델링이 필요하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고 “드럼이 바뀌면 리듬도 바뀐다. 따라서 스텝도 바뀌어야 한다.”라는 아프리카의 속담을 경구로 삼아야 한다. 에큐메니컬 집단 지성과 현장의 일꾼들이 교회와 사회를 개혁하고 불의와 억압에 저항하며 정의와 평화, 생명과 사랑이 더욱 풍성해지는 운동을 지속적으로 벌일 때 교회협의 밝은 미래를 전망해도 좋을 것 같다. 우주적인 오이쿠메네(oikoumene), 지역적인 오이쿠도메(oikoudome)의 조화를 이루어가는 에큐메니컬 운동이되기를 소망한다.(끝)
안재웅: 아시아기독교협의회의 총무, 한국YMCA전국연맹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YMCA전국연맹유지재단 이사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역사가 내미는 손 잡고』, 『에큐메니컬 운동 이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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