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절 중국留日YMCA에 대하여
“YMCA史』에서는 중화유일YMCA의 발회 경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1905년(메이지 38년) 러일전쟁 이후 청나라 학생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오는 경우가 매우 많아졌다, 한때는 1만 명에 달했다. 일본인들은 대체로 이들에게 냉담했다. 그해 겨울, 중화기독교청년회의 의뢰로 장패지 등이 일본에 와서 조사한 결과, 그 필요성이 인정되어 1906년(메이지 39년) 봄, 도쿄 YMCA의 한 구석에서 留日中華基督教青年会 발회식이 열렸다. 당시 漢口YMCA에서 근무하던 클린턴(J.M.Clinton)이 도쿄에 파견되어 총간사가 되었고, 왕정정(王正廷)이 부총간사로서 회무를 지도했다.
이듬해 와세다에 기숙사가 만들어지고 1910년(메이지 43년) 칸다구 기타진보초(神田区北神保町)에 토지를 구입하여 청년회관이 건립되었다. 공상희(孔祥煕) 등도 간사로 잠시 일한 적이 있으며, 마백원(馬伯援)이 주임 주사가 되었다. 1921년(다이쇼 10)대에는 주임 7명, 회원 1,000여 명, 재경 중국인 학생 대부분이 이곳을 드나들었다.
전 장에서도 언급했듯이, 1905년 증가하는 도쿄의 중국인 유학생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한-중-일-홍콩 기독교청년회 연합위원회의 부총무 라이언과 위원 장패지(張佩之)가 파견되었다.
그 결과 이듬해인 1906년에 재일 중국인 YMCA가 설립되었다. 설립 초기에는 칸다미토요초(神田美土代町)의 도쿄 YMCA의 일부를 빌려 사무실로 삼고 유학생들에게 영어 교육을 실시했다. “YMCA사』에 기재되어 있는 기타신보초(北神保町)에 건설된 회관의 공식적인 낙성식이 거행된 것은 1912년 10월 12일이었다. 이 날 준공식에는 중국 YMCA의 왕정정(王正廷), 주일한국 영국 대사가 참석했으며, 일본인으로는 당시 도쿄 시장이었던 한가야 요시로(阪谷芳郎), 전 수상 오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가 연설했다. 일본YMCA연맹을 대표하여 참석한 신토도 이나조, 도쿄YMCA 총무 야마모토 쿠니노스케가 축사를 했다. 이 면면을 보면 중국유일YMCA의 존재가 당시 일본 정계, 교육계, 종교계에서도 큰 관심을 보였다, 종교계에서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YMCA史』에도 이름이 올라 있는 공상희가 총간사로 활동한 것은 1913년부터 1914년 가을까지였다. 공상희의 아내였던 송애령(宋靄齢), 그의 여동생인 송경령(宋慶齢)(손문 부인)도 중화유일 YMCA에서 한동안 영어 교사로 일했다고 한다. 회관에는 체육시설도 갖추어져 있으며, 『YMCA사』에는 1913년에 북미 YMCA 동맹에서 일본 YMCA 연맹에 파견된 체육사업 전문가 프랭클린 H. 브라운의 보고서의 일부가 인용되어 있다. 칸다에 있던 중국 YMCA에는 강당 겸용의 체육관이 있었는데, 그곳에서도 농구와 다른 놀이가 무관리 상태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시 주임이자 훗날 국민당 정부의 거물이 된 공상희(孔祥熙, Dr. H. H. Kung)와 협력하여 체육지도를 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일본에 유학 중이던 중국인들은 대부분 귀국했지만, 중화민국이 성립되자 다시 돌아오거나 새로 유학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시대에 칸다(神田) 지역에 기숙사와 집회소를 가지고 있던 留日YMCA는 기독교 신자뿐만 아니라 일반 유학생들과의 관계를 강화하여, 옛 청국 유학생 회관을 대신하여 '당지 유학생의 유일한 사교기관으로 크게 이용되는 곳"이 되었다. 도쿄 조선 YMCA가 조선인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된 것처럼, 중화유학 YMCA도 1910 년대에는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할 때 대책협의의 장이 되기도 했다.
당시 이 留日YMCA를 드나들던 유학생 중 한 명이 저우언라이(周恩来)였다. 저우언라이는 1917년 9월부터 1919년 5월까지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저우언라이는 유일 YMCA 바로 근처에 있던 동아고등보통학교 등 예비학교에 다니며 일본 관립학교 진학을 목표로 했는데, 당시 생활을 기록한 저우언라이의 '여행일기'에는 '청년회에 친구를 방문한다' 혹은 '청년회에 가서 신문을 읽는다'라는 서술이 자주 등장한다(周恩来, 『十九歳の東京日記』.) 저우언라이는 도쿄 고등사범, 제일고등보통학교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고 결국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귀국 후 5.4운동에 참가하고, 이듬해에는 파리로 유학하여 중국 혁명에 몸을 던지게 된다. 중국 혁명에 투신하게 된다. 그가 공부한 동아고등예비학교 터에는 지요다구 일중우호협회(千代田区日中友好協会)가 세운 ‘저우언라이가 이곳에서 배웠다'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千代田区神田神保町 2-20-3 神保町愛全公園の敷地内に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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