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복 / 한국생명학연구원장
팔레스타인의 친구들이 공개 편지를 보내왔다. 루터교회에서 사용하는 성만찬의 잔이 일반 개신교회의 성만찬에 이용하는 잔보다 큰데, 비유하기를 반(半) 잔의 성찬, 이것이 마를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희망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질문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가 희망을 상실해 가고 있는 것이다. 희망을 상실하면 기회가 없어진다. 우리의 기도회가 중요한 이유다. 그들에게 희망을 조금이라도 줄 수 있는 것이 기도회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달리 지원할 수도 있지만, 희망을 가질 수 없는 곳에서 어떻게 하면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할 것인가가 중요한 것 같다. “희망은 가능한가?‘라는 그들의 메시지다.
상황이 복잡하다. 초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의 초점은 이스라엘이 1948년에 국가를 세우면서 또 67년 6일 전쟁을 일으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소유하고 살아가고 있던 지역, 국가의 영토를 점령했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 나머지는 그 점령으로 인해 생기는 결과다. 점령이 핵심이다. 그 점령은 군사적인 점령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팔레스타인 평화는 점령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협상을 한다든가, 조정을 한다든가 하는 것은 처음부터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완벽하게 합병한 것이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이다.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 내에서도 패가 둘로 갈라졌다. 1905년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을 ‘세계적인 차원에서 국가로 독립을 인정할 수 없지만, 대신 자치를 허용할 수 있다’는 제안을 했다. ‘내가 외교를 담당할테니 당신이 자치를 감당하시오’라는 제안을 안창호에게 했다. 난민이라는 표현도 점령에 비추어보면 이것은 망명이다. 난민이란, 자기 나라에서 쫒겨난 것이다. 경제적인 이유, 정치적인 이유에서 쫒겨난 것이다.
이번에 팔레스타인에 가보니, 우리나라와 달리 점령 안에서 또 하나의 점령이 있다. 그것은 정착촌이라고 표현되는 점령촌을 만드는 것이다. 완전히 유대인화하는 작업이다. 점령촌은 다시 내 줄려고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점령하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안에 있는 제일 좋은 땅만 골라서 유대인화하는 것, 그것이 점령촌 정책이다.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면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비극적으로 생각하는 것인데, 우리나라에서의 독립운동이 분열된 것처럼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분열되어 있다. 이 분열을 자기들의 잘못이기라고도 생각하지만, 객관적으로 밖에서 보면, 이 분열은 이스라엘의 공작을 통해서, 미국을 활용해 파타를 끌고 오는 것인데. 유대인 재벌, 소로의 글을 보면(뉴욕타임즈), 이 사람은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을 하고 있는 사람이지만, 이 문제에 대해 ‘하마스와 파타를 분열시키는 것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문제를 항구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겠다는 의도다’라고 쓰고 있다.
분열은 대단히 무서운 것이다. 지금 현재 우리나라도 남북이 분열되면 통일이라는 것이 없다. 북한도 북한은 독립했다고 생각하지만, 중국과 러시아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도 이런 말을 하면 보안법에 걸리지 모르지만, 한국의 군대에 대한 지휘권을 미국이 갖고 있다. 이것이 독립 국가인가? 이것은 남북이 통일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주성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 두 가지 있다. 민주주의가 발전하면 국민이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하기 때문에 자주성이 커진다. 또한 남북이 정책적으로 결합만해도 자주성이 커진다. 제 삼국에 있는 동포들에 대한 협력을 함께한다든가.
팔레스타인에 갔을 때 가자와의 접촉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E-mail 정도로 접촉한다는 대답을 듣고 이것은 대단히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 일제시대의 점령과 구조적으로 유사성을 생각해본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자치정부를 갖고 있는데 - 치안도 책임지지 못하지만, 그러나 하마스는 자기들이 치안을 담당할 수 있다. 2007년 암만포럼에 참가해서 호소한 것이 있다. 팔레스타인에 ‘국제적인 기구와 위원회들이 왜 그렇게 힘이 없고 무관심한가?’라는 질문이 있는데, 그것이 희망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미국과 유엔, EU와 함께 같은 아젠다를 갖고 협력하고 있다. 점령문제를 해결하려하지 않고, 인권문제 자체도 잘 다뤄지지 않는다. 이들이 있는 한 이스라엘의 아젠다는 계속해서 진행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한 대응 세력이 없다. 과거에는 러시아가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대응세력이 될 수 없고, 아랍세계 자체가 너무 힘이 없다. 이란만 갖고는 안된다. 국제사회의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는 힘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팔레스타인 영토 회복, 독립을 어떻게 이뤄낼 수 있는가?
우리가 팔레스타인에서 이야기하고 경험했던 인권의 문제는 점령의 문제로부터 시작한다. 특이하고 재미있는 사안 중 하나는 예루살렘의 문제다. 예루살렘문제는 밖에 있는 사람들이 이해할수 없다. 왜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 예루살렘하는가?’ 표면적으로는 그곳에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 성지가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이스라엘도 아니고, 팔레스타인도 아니다, 중립지역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래야 다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것 아닌가?
결론적으로 팔레스타인에서 이상한 충동을 느꼈는데, 찬송가 중, 새롭게 떠오르는 예루살렘에 대한 찬송가인데, 이것이 밑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경험을 했다. 속으로만 불렀다. 도저히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의 상황에서는 찬송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2007년 암만포럼에서 발표한 논문이 있는데, 그 때 제안이 이슬람과 기독교인, 유대인들이 함께 예루살렘이 평화의 도시라는 비전을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이 상당히 상징적이고 상상력을 유발시키는 종교적으로 하나가 되는, 평화의 비전을 공유하는 열쇠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공동의 비전을 가지면 평화를 위해 조금씩이라도 10가정이라도 함께 모여 평화를 나눌 수 있는 실험을 해보는 것이다. 이 삼자가 만나 펴오하에 대해 말해야 한다. 다음에 팔레스타인에 다시 간다면 삼자가 만나는 자리를 만들었으면 한다. 평화를 어떻게 말할 것인가?를 이야기했으면 한다.
예루살렘은 정치적인 것도 있지만 경제적인 이권관계의 반영이다. 또 다시 예루살렘에 대한 노래를 부를 수 있을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끝.
1) 이 글은 10월 21일(목, 오후 7시, 한국YMCA전국연맹 회의실(지하2층)), 팔레스타인 평화를 위한 기독인네트워크 10월 기도회에서 대화록을 속기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잘못 기대된 내용이 있는 것은 속기자의 잘못임을 밝힙니다. 따라서 본문의 내용을 인용하거나 하시면 안됨을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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