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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세계평화대회 주제강연, 한국 100년 평화의 염원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 김영호 (동북아 평화센터 이사장/성균관대 석좌교수)

by yunheePathos 2018. 11. 7.

2018 세계평화대회 주제강연 2. 

인천하버파크호텔

2018. 10. 29.


한국 100년 평화의 염원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김 영 호 동북아 평화센터 이사장/성균관대 석좌교수



2. [강사2] 김영호.pdf

영문 자료 보기


1. 수백만 까치들의 평화의 꿈

최근 차마 바로 보기 어려운 옛 그림 한 점이 나왔다. 까치 한마리가 메마른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데 털은 다 빠지고 어디 날아갈 힘도 없고, 어디 호소할 곳도 없는 가엾은 까치그림이다.  

나무 그림으로 유명한 李霆(1541~1626)의 작품인데 임진왜란 때 피난가다 왜군의 칼에 맞아 오른팔이 부러져 그 후 왼팔로 그렸다는데 아마 그때 전란 속의 민중의 신산한 모습을 까치모양으로 상징적으로 그린 것이다. 당의 유명한 시인 차천로가 화제시를 쓰고 당의 명필 한석봉이 이 시를 붓글씨로 썼다. 당 삼절합작품이다. 한국판 게르니카라 할까? 화제시의 내용은 이러하다.

"굶주린 새 찬 나뭇가지 위에 앉아있네 머리를 돌렸는데 털이 다 빠져있네

들을 것도 없고, 볼 것도 없는데 입을 열어 어디 호소할 곳도 없네"



 나는 이 까치 그림을 보고 첼로의 거장 카잘스(Pablo Casals)의 Birds를 연상하다. 카잘스는 Birds of the Sky이나 이 그림 속의 새는 차가운 가지 위의 새이며 The song of the Birds라고 했으나 이 그림 속의 새는 노래할 힘조차 갖지 못하니, Silence of the Birds 라 할 만하고 새가 “피스 피스 피스“하고 노래한다고 했으나, 이 그림 속의 까치는 피스를 외치지도 못하고, Dream of the Peace 먼 평화를 꿈꾸었을 뿐이다. 

이 까치는 륙세력과 해양세력간의 긴 싸움 그리고 그 현판 4강 사이의 ‘전쟁’(지진가 아닌)의 끊임없는 전란에 희생된 한국인의 모습이다. 근현사의 경우에도 청일전쟁(1897), 러일전쟁(1905), 중일전쟁(1932), 태평양전쟁 그리고 6.25전쟁(1950), 베트남전쟁 그리고 냉전, 현재의 해양세력의 천여년의 롱 게임에 수많은 까치들이 죽어갔고, 평화를 꿈꾸어 왔다. 20세기에도 동학 난 때 20만이 죽었고, 식민지화로 전 인구의 30%전후가 해외 유랑을 떠나고, 20만이 위안부가 되고, 50만이 징용자가 되고, 20만이 원폭 희생자가 되고, 또 6.25전쟁으로 100만이 죽었다. 간신이 살아남은 까치들은 찬 나무 가지 위에서 신음하며 간곡히 꿈꾸는 것은 오직 평화다!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전쟁의 희생자가 된 이들의 특권은 평화의 변자가 되는 것이다.


2. 칸트의 영구평화론과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의 비교

 인류의 평화의 꿈은 칸트의 <구평화론>으로 표현되었다면 한국 까치들의 평화의 꿈은 안중근의<동양평화론>으로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칸트의 구평화가 주권국가의 연합과  도덕적 시민의 육성 그리고 민주공화제의 확립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안중근의 동양평화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으로부터의 주권국가의 수호와 도덕적이고 민주적인 시민의 육성, 그리고 구미시민사회와의 연 그리고 시민표들로 구성된 동양평화회의의 설립, 그리고 동양평화회의 공동금융운용과 공동경제개발 그리고 공동 군운을 구상하다.

 여기서 먼저 칸트의 구평화론이 유럽의 베스트파리아체제의 성립을 배경으로 주권국가의 중요성을 전제로 한 주권평화론이라면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일본의 동양주의론의 상국의 주권침략을 은폐한 속임수 지역주의와의 결을 전제로 한 것이다, 독립 없이 평화 없다는 독립평화론이다, 독립운동이 평화운동에 통합되고 있다. 독립운동이 비평화적 형태를 취할 수 있겠으나 그래도 그것은 장기적, 거시적으로 평화운동에 귀결될 수 있는 것이며, 가급적 독립운동이 평화운동의 성격을 갖도록 조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칸트의 구평화론의 민주공화제가 국가의 전쟁충동을 억제하는 효과를 갖는 것이 사실이고 그런 점에서 민주 평화론이 중요하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한제국에서 상해임정에서 표방한 민주공화제로 가는 과도기의 산물이다. 당시 국체보상운동이 중요하다. 이 운동은 국가가 일본에 진 차관을 상환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상황에서 채무자도 아닌 일반 시민들이 “우리가 국민이다“(Wir sind das Volk)이고 국민선언운동을 벌리며, 국민의 책임으로  국가의 부채를 국민이 신 갚는 국민책임운동이다. 여기에 참여한 국민은 약 40만이지만 이것은 사실상 가구 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당시 가족제로 가구당 7-8명으로 보면 약 300만이며, 총 인구가 1500만 정도라면 전인구의 20%정도이다. 안중근도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며 시민의 역량을 절감하여 동양평화론에서 시민표로 동양평화회의를 구성할 것을 제의하고 있다. 그리고 동양평화회의가 동아시아의 공동경제개발, 동아시아의 공동군보유, 공동은행과 공동화폐발행 등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칸트적이라기보다 쟌 마네 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안중근은 개별국가의 주권독립과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일체화시키고 있다. 칸트의 구평화론의 민주공화제가 불란서 혁명 이후 나폴레옹의 팽창주의를 억제하는데 무력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각국의 시민표로 동양평화회의를 구성할 것을 제안하여 칸트의 한계를 넘어 오늘날 EU의 탄생을 쟌 마네보다 반세기 먼저 준비한 평화론이라 할 수 있다.


3.  3.1운동 100주년의 역사적 의의 

단군 이래 우리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은 3.1운동일 거라는 주장이 있다. 나도 그 주장에 동의 할 수 있다. 200만의 까치들이 참여한 만세운동이라지만 당시 말 꽤나 하는 뜻있는 인사들이 장소는 달라도 같은 의미로 통하는 같은 광장에 모두 모여 제국주의의 탄압을 무릅쓰고, 탈식민주의 의사를 나의 목소리로 여러 사람과 함께 세계사의 하늘에 함성을 수놓았던 것이다. 

  3.1운동에는 민족사를 넘어 세계사적으로도 뜻 깊은 그러나 희미하여 눈을 부릅떠야 볼 수 있는 세 가지의 무지개가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첫째 무지개는 1차 세계전 후 윌슨 미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나왔을 때 그것은 1차 세계전의 전승국가에는 해당되지 않은 것이었다. 레닌의 민족자결원칙이 나왔으나 러시아연방 밖은 해당되지 않는 원칙이었다. 따라서 해당되지 않는 식민지 반식민지의 부분이 손을 놓고 있었는데 한국만이 적극 활용하여 3.1 운동을 일으킨 내부의 역량이 무엇이었을까? 둘째는 한국의 3.1운동, 중국의 5.4 운동, 필리핀의 독립운동, 베트남의 독립운동, 인도의 독립운동, 이집트의 독립운동,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운동 등이 도미노식으로 일어났다. 이러한 연쇄의 시작은 3.1운동이었다. 그 연쇄의 무지개 닷새째로 3.1 운동에서 비롯하여 그 후의 다양한 운동과 혁명을 거쳐 촛불혁명 그리고 앞으로 피어날 미래혁명, 그간에 단절도 있겠으나 평화운동으로서의 연속과 진화의 무지개가 있다. 

    (1) 내재적 무지개

첫 번째의 무지개를 다시 살펴보자.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란 외적 요소를 적극 활용하게 한 내적 요소로 국민의식의 고양을 주목할 수 있다. 왕조의 백성이라는 틀에서 민국의 국민이라는 틀로 이어지는 무지개다. 맹자의 민본사상을 기반으로 한 민국이란 용어가 조선왕조실록에 18세기 초에 수십 개 나오던 것이 19세기 말 고종실록에는 수백 개로 증된다. 한중일 비교사상사연구의 가 체진풍교수(만)는 동양에서 민본사상을 민주사상으로 전환시킨 학자는 정다산 밖에 없다고 발표했다. 여기에 최한기를 추가해도 좋을 것이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이 민중 속에 번져 나갔고, 19세기의 쇠퇴기와 20세기 초의 망국사의 골짜기에서 민권 민주개념이 자각되었다. 기독교 유입 애국계몽운동 그리고 의병운동의 전개 등으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가 성장해 갔다. 국채보상운동은 정부가 진 외채를 민국의 주인인 국민이 민국의 주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국민되기운동’의 일환이었다. 국채보상금을 내는 전국 본부를 ‘의무소’라 했다. 이준열사는 만국평화회의에 가서 국채보상운동을 들어 독립자격의 증거로 내세웠다. 안중근의사는 국채보상운동의 경험에서 각국의 민간표로 동양평화회의를 만들고 자금도 조달하여 국가단위의 침략정책을 제어할 것을 제시하다. 이와 같이 아시아에서 상적으로 높았던 민국의 주인의식이 윌슨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다른 나라보다 적극 활용하게끔 작용한 내적 요인이 되었던 것 같다. 그 결과 3.1운동과정에 자연스레 임시정부의 민주공화제가 탄생했던 것이다.

   (2)동아시아적 파급의 무지개

 두 번째 3.1운동이 외국에 던진 직접간접의 향이 국제적 무지개를 이루고 있었다. 각국의 독립운동의 내적 과정을 별도로 하면 외적으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자체보다 윌슨주의에 자극받아 일어난 3.1운동에 향 받은 측면이 강하다. 중국은 5.4운동을 주도한 잡지 “新靑年”, “國民”, “新潮”등은 다투어 4월호에서 3.1운동 특집호를 발행하다. 북경의 학생구국회의 기관지 “國民”4월호로 3.1운동 특집호를 내고, 곧이어 간부들이 편집실에 모여 회의하면서 5월 4일 천안문광장에서 봉기하기로 결의하고, 그 결의를 각급학교에 통보하다. 5.4운동의 지도자이면서 新靑年의 편집자이기도한 陳獨秀는 3.1운동을 ‘세계혁명사의 신기원’으로 높이 평가하고 그이유로 ‘用民意 不用武力‘을 들고 있다. 5.4운동 때 학생회의 주석이었고 新潮의 편집인의 한사람인 簿斯年 역시 3.1운동을 ‘혁명계의 신기원’으로 높이 평가하고 그 이유로 첫째, 정의의 결정인 무기 없는 혁명이라는 것 둘째, 안될 것을 알면서도 감행한 운동이라는 것, 셋째, 단순한 학생운동이라는 것을 들고 있다. 5.4운동 지도자들이 3.1운동을 민의 평화운동으로 파악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5.4운동 당시 천안문광장에 운집한 학생들은 “북경학생천안문회선언문“에서 ‘조선인이 뜻을 이루지지 않을 바에야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지적하고 있었다.

또한 인도의 국민회의가 주도한 4월 5일부터의 사타야그라하운동에도 3.1운동은 강력한 외적요인으로 작동하다. M. 간디는 남아프리카 여행 중 3.1운동 소식을 듣고 급히 뉴델리로 귀환하다. 네루가 감옥에서 딸에게 주는 편지형식으로 쓴 “세계사편력”에서 3.1운동을 특기하면서 3.1운동 때의 한국여성을 본받으라고 한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인도의 유명한 비폭력운동이 3.1운동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불확실하나, 타골이 한국을 ‘동방의 빛나는 등불’로 부른 것도 이러한 배경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불란서의 식민지던 베트남에서는 호지명과 판쩌우칭이 윌슨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에 향을 받아 제시한 “안남인민의 요구” 8개항에서는 독립요구 신 체로 개량적 요구에 그치고 있다. 그러나 3.1운동 후 파리에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한국의 독립투사 김규식 등과 만나 매우 친해져 개량주의의 한계를 넘어 식민지 독립투쟁으로 전환을 하게 된다. 최근 파리경찰 장(Jean)의 호지명에 한 조사보고문이 발견 되었는데, 호지명은 9년 연상에 학식이 높은 김규식을 많이 따랐으며, “호지민은 한국인들이 하는 모든 일을 자신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는 일제에 저항하는 한국인의 계획을 거의 똑같이 따르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호지명은 1919년 프랑스의 일간지 르 포퓔레르에 ‘인도차이나와 한국’이라는 글을 투고하여 일본의 조선 식민정책과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정책을 비교하고 있다. 3.1운동은 호지명을 통하여 베트남 해방투쟁에 큰 향을 미친것으로 보이며, 훗날 호지명은 중경임시정부에도 방문한바 있다. 그 뒤 호지명은 레닌주의에 접하면서 더욱 급진적 혁명적이 된다.

 미국의 식민지상태던 필리핀의 마닐라학생들이 일으킨 6월 독립운동이나 베트남학생들의 독립운동, 이집트의 카이로학생들이 일으킨 6월 독립운동도 3.1운동의 직접 간접적 도미노현상의 일환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점에서 3.1운동은 불란서혁명이나 러시아혁명에 이은 국제적혁명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 3.1 운동에서 촛불혁명까지 파급되는 무지개를 넘어서

 셋째, 3.1운동이 일회성 운동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끊임 없이 재생되고 진화되어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4.19혁명, 5.18광주민주항쟁, 6.10항쟁 그리고 최근의 촛불혁명으로 연속되었다. 3.1운동자체가 구한말의 평화적인 애국계몽운동과 폭력적인 의병운동을 평화운동으로 흡수 승화한 운동이었고,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평화운동으로 승화시켰으며, 한국의 평화와 동아시아평화 및 세계평화를 연결시킨 국제적 평화운동이었다. 그런 점에서 한 뛰어난 까치의 평화사상으로 그려진 것이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었다면 수백만 까치들의 집단자성과 집단행동으로 표현된 것이 3.1 운동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권독립운동과 민주계몽운동을 통합한 평화운동으로 독립민주평화로 동아시아의 독립민주평화운동을 촉진하고 연한 운동이었으며, 세계평화운동과 연계하고자 시도 하으나 헤이그 평화회의나 파리강화회의는 아직 그 운동을 수용할만한 태세를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그 후 상황과 조건의 변화에 따른 불연속이 있는 것은 당연하겠으나 세 가지를 종합하고 승화시킨 평화혁명의 성격은 연속적으로 진화되어 촛불혁명에서 최고조로 표현되었다.   3.1운동은 상해임정이란 외아들만 낳은 것이 아니다. 임정에 맞섰던 북경파 사회주의계열의 연안파, 연해주파, 국내파, 미주파 등등 다양한 아들,딸들을 낳았다. 이승만 통령은 남한단독정부에 반하는 김구 계열의 남한단독정부수립 의에 곤란을 겪다가 제헌헌법에 상해임정을 계승한다는 표현을 강조했는데 갑자기 급조한 단독정부가 아니라 임시정부를 이어온 정통성 있는 정부라는 명분이 필요했던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북의 김일성 정권에 한 결을 염두를 둔 냉전적 조처다. 그러나 이것은 센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추진하는 미정부와 그 행기구 미군정청에 의해 탄생한 이승만정부의 국제법적 성격에 전혀 맞지 않는 형용사적 장식에 불과했다. 이제 남북이 3.1운동 100주년을 같이 기념하기 위해서는 3.1운동의 상을 바꾸어야 한다. 아울러 북한정권의 입장에서도 혁명사관의 재구축이 필요하다. 3.1운동은 많은 형제자매의 어머니로 그래서 좌우 독립운동을 통합하는 공동의 어머니로 재구축되어야 한다. 한국의 모든 운동과 혁명은 3.1 운동의 연속과 단절-연속 속의 단절과 단절 속의 연속-선상에 존재한다. 

  3.1운동은 구한말의 애국계몽운동조류와 의병운동의 무장투쟁조류를 평화운동의 문맥으로 승화시킨 것이라면 6.10 만세운동(1926)은 일제자본의 량투자로 일정하게 노동자계급이 형성되어 노사관계 속에 민족적 모순과 계급적 모순이 집약되어 그 모순에 도전하는 노동운동이 집중적으로 전개되었으며, 마침 이 무렵에 마르크스주의사상과 호응하여 민주평화운동의 폭을 크게 넓히게 되었다. 이 조류는 최근의 촛불혁명의 해 속에 용해된다. 광주학생운동(1929)은 이미 3.1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학생들이 광주에서시작되었지만, 전국적으로 학생중심의 독립운동을 전개한 형태로 후에 이승만 정권을 타도한 4.19혁명(1960)으로 재현되었으나 역시 최근의 촛불혁명의 해의 주류의 하나가 된다. 6.10항쟁(1986)은 박정희 정부의 급격한 산업화정책의 진전으로 광범하게 형성된 중소득자층(소위 넥타이 부)과 민주화운동권의 연에 의한 시민민주주의운동이었다. 이 운동으로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시민혁명에 의한 정권교체기 이루어졌고 역시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보수 진보정당간의 평화적 정권교체가 정기적으로 이루어졌다. 

  촛불혁명(2016년 겨울 ~ 2017년 봄)은 3.1운동 이래의 독립운동,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학생운동, 시민운동, 진보적 민주주의운동, 여성운동 등의 수많은 강물들을 평화적으로 통합한 하나의 해운동이었다. 한겨울 차가운 저녁에 2,000만 이상의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에 모여 평화로운 질서 속에 쓰레기조차 남기지 않고, 아마도 단 한 건의 폭력도 불상사도 없이 어린애를 데리고 나와 기도하듯 데모를 하는 현장은 감동적이었다. 이 촛불혁명을 두고 광장민주주의 혹은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준 세계민주주의혁명의 도달점의 하나로 평가하고 있으나 오히려 나는 3.1운동이 평화운동으로 보는 해석의 연장선상에서 촛불혁명을 현 평화혁명의 도달점의 하나로 해석하고 싶다. 그것은 운동의 형식 내지 자세에 있어서의 평화적이었다는 점만이 아니라 앞서본 바와 같이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 학생운동, 시민운동, 진보민주주의운동 등 평화의 핵심요소를 깊이 끌어안은 반제민주평화운동이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비핵화운동의 전개이다. 우선 역사적으로 히로시마원폭의 피해자 중 약 2만 이상의 한국인 피폭 생존자와 그 자손들이 벌리는 비핵화운동이다.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희생자들이 벌이는 비핵화운동은 그들이 일본의 전쟁범죄의 직간접 동조자로 전쟁 가해에 한 반성과 사과 없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는 한계와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히로시마 원폭의 진정한 희생자는 한국인 피폭자들이라는 인식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고 그들이 가장 집중적으로 살고 있는 합천을 중심으로 세계비핵화평화운동을 벌리는 것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1991년 남북한이 합의하여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을 공동 발표한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본격적인 북한비핵화결단은 지난 4월 판문점정상회담에서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판문점선언을 발표한 후 북미를 중심으로 북핵문제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비핵화평화운동이 추가되어 반제국 민주 비핵화 평화운동이라는 형태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한마디로 평화운동이다.

모든 문제는 평화운동이라는 차원에서 모든 것을 평화로 귀결시켰던 것이다. 아울러 한국의 평화운동을 동아시아평화운동 및 세계평화운동의 일환으로 의식하고 그런 의식에서 운동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지구냉전의 최후의 고리에서 100년 전쟁의 최의 피해자인 수천만의 ‘까치’들이 세계무기 60%(SIPRI추산) 이상이 집중 배치되어 세계 군산금융복합체의(Military- Industrial-Financial Complex)의 최의 시장이 된 전쟁’에서 간절히 바라는 꿈은 오직 평화던 것이다.


      4. 세계평화운동의 코리도의 건설과 세계평화포럼의 개최를 제창하며

진정한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이신 신채호 선생께서 한국사는 지정학적으로 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접점에 놓여있어서 양쪽의 도전에 늘 상처를 입었지만 그 상처 덕택에 이 지역이 큰전쟁 없이 지나 왔지만, 한국이 없어지자 중일전쟁과 같은 큰 전쟁이 일어났다고 하여 지역의 모순이 한국의 전란으로 귀결되었으나, 지역의 평화도 한반도에서 비롯된다고 전망하다. 호주국립학의 모리스 스스기교수는 동북아의 전쟁은 한반도에서 시작되고 동북아의 평화도 한반도에서 시작되는 메카니즘을 분석하고 있다. 우리는 촛불데모로 탄생한 정부에서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작동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남북정상회담-북미정상회담-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거쳐 제2차 북미정상회담으로 그리고 북일정상회담으로 이어질 전망이고 지구의 마지막 냉전체제가 해체되는 전망을 열어주고 있다. 우리는 촛불혁명 이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세계적 전개를 주목하면서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가 상당부분 한반도에서 시작되는 현상을 재확인 할 수 있었다. 동시에 우리가 절감했던 것은 한국의 촛불혁명이 주도하는 평화프로세스가 세계 4강의 파워 앞에 매우 취약하다는 사실이다. 4강의 국가 이익과 선거 전략에 따라 얼마든지 뒤집혀 세계전쟁의 진원지로 바뀔 가능성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세계평화시민과 연를 강화하고, 강력한 지원을 받아내고, 세계평화세력을 변하고, 세계평화시민을 강력한 우군으로 확보하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 스위스 다보스에서 매년 개최하는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 이하에서는 WEF로 표기) 같은 세계평화포럼(World Peace Forum 이하에서는 WPF로 표기)를 개최하는 것이 어떨까. 이미 세계사회포럼이 있으니 어떤 형식이든 연계해서 함께 살리는 길을 찾아보면 어떨까 한다. 세계에는 이미 수천의 평화단체가 있다고 한다. 여기에 허브가 아니라 시민사회의 평화르네상스의 의지를 담아서 네트워크를 강화하여 코리도(Corrido)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시민사회 평화 코리도에서 WPF는 평화플랫폼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에서 정부 간 연계관계는 매우 다양하지만 시민 간 연관계는 미약하고, 양자 간 불균형이 심하다. 동아시아에서 국가 간 적관계 내지 마찰이 정치권력의 필요에 따라 이루어지고, 시민사회가 동원되는 현상이 빈번히 연출된다. 독재권력은 토분쟁이나 역사분쟁 등을 이용하여 주변 국가를 적으로 돌리고 적적 상호의존관계로 토 내셔널리즘 혹은 역사 내셔널리즘을 고취하여 시민사회를 동원하고 권력기반을 강화 한다. 민주주의가 발전할수록 적적 상호의존관계는 약화될 것이나 문제는 적적 상호의존관계가 민주주의의 성숙을 저해하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12억의 중산층사회가 민주시민사회로 전화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독재국가의 적적 상호의존전략에 상당한 정도로 기인하고 있는 것 같다. 역사적으로도 불란서 혁명 후 불란서 민주주의가 나폴레옹의 팽창주의를 억제하지 못한 것은 시민사회의 국제적 조직화의 필요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앞서본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의 시민사회표로 동양평화회의 구상이 주목되고, 그 현판으로 세계시민사회의 코리도와 WPF 구상이 검토 됨직 하다. 세계를 정부 간 관계에 맡기는 위험성을 견제하고 완화하는 거버넌스의 보완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보완책의 차원을 넘어서 시민의 시의 새로운 시민지평의 확이기도 하다. 세계평화세력의 시선이 한반도로 모아지고 있는 지금의 호기를 살려야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작년 11월 3일 일본의 헌법기념일 도쿄 시민 5만 명이 일본의 평화헌법수호상징으로 국회의사당포위행사를 벌일 때의 초청강연에 “현세계에서 순수한 국내 문제는 거의 없다. 진보적 경제학자 P M Sweezy는 현실문제는 역사문제라는 루카치의 명제에 따라<역사로서의 현재>라는 명저를 내었지만 그런 식으로 순수국내문제는 거의 없다. 세계문제로서의 국내문제이다. 일본의 평화헌법은 아시아와 세계의 문제이다. 일본의 시민사회만이 싸울 것이 아니라 세계의 시민사회의 공동의 문제로 싸워야 한다. 우선 한국의 촛불혁명세력과 일본의 9조 의회세력이 공동으로 평화시민세력과 연하여 평화헌법을 함께 지키자. 이것을 계기로 스위스의 다보스에서 해마다 여는 세계경제포럼(WEF)과 같은 규모의 시민판 세계평화포럼(WPF)을 개최하자고 강조했다. 그리고 지난 3월 15일 일본의 <전쟁을 허용하지 마! 9조를 부수지 마!다함께 행동 실행위원회> 핵심간부 11명을 초청하여 촛불혁명의 표적 단체의 하나인 <주권자 전국회의> 와의 공동심포지움에서 다시 한 번 연를 다짐하고, 같이 WPF를 연구하고 추진하자고 합의했다. WPF는 올림픽처럼 이동식으로 개최할 수도 있을 것이다. 


   5. 결론에 대신하여 

  우리는 3.1운동 100주년 행사를 남북한 공동으로 개최하는 것을 뜻 깊게 생각한다. 앞에서 살펴본 것 같이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독립운동, 베트남의 독립운동 등이 의외로 관계가 깊고 같이 100주년을 맞이하고 모두가 민간판 평화운동이라는 점에서 서로 연계하여 기념행사를 개최할 수 없을까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평화운동에 앞장서 온 한국YMCA연맹 등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토론해 오고 있다. 아울러 지금과 같이 세계의 시선이 집중되고 관심이 고조될 때를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국내외에서 추진 중인 각종의 평화 관련 행사를 찾아서 WPI틀 속의 한부회로 들어오도록 조정을 시도해보고 있다.  우리는 내년 3.1운동 100주년에 3.1운동의 최근판인 촛불혁명의 현장에서 세계시민사회의 표자들과 함께 원히 꺼지지 않는 촛불 점화식을 하면서 WPF를 열수 있기를 기하고 있다.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이 한국민족주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세계시민의 평화주의 차원에서는 상징이 되기를 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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