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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의 끄적거림/원고

2018 세계평화대회 국제심포지엄 발표 1. 동-서 독일간 갈등과 화해, 치유를 위한 민간의 역할(독일의 경험, 게르하르드 라인/Gerhard Rein)

by yunheePathos 2018. 11. 10.

2018 세계평화대회 국제심포지엄 발표 1

2018. 10.29, 인천하버파크호텔


동-서 독일간 갈등과 화해, 치유를 위한 민간의 역할(독일의 경험)

게르하르드 라인(Gerhard Rein)


1. [발표1] Gerhard Rein.pdf

영문 발표자료 보러가기



* 급한 일정으로 인해 일부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영문 자료를 본 텍스트로 참고해 보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보고서를 발간하며 수정보완하여 제공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독일민족은 1933년 처음으로 적에게 항복하였다. 노동자와 소부르조아, 과학자, 사업가, 예술가, 신학자, 온갖 교수들이 민족주의적, 인종주의적, 반셈족 운동과 그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에게 항복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적이다. 오해하지 말라. 독일인 대부분은 히틀러를 좋아했다. 그것이 우리의 파국이었다. 히틀러는 수천년을 지속할 제국을 약속하였다. 12년이 지나자 그 제국은 끝났다. 제이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고, 수백만의 여성과 남성과 아이들이 죽었다. 1945년에는 두 번째 항복이 왔다. 독일인들은 러시아와 미국과 영국과 프랑스의 군인들에 의해 해방되었다. 194558일은 패배의 날이 아니었다. 내 마음 속에 그 날은 해방의 날이었다. 내부의 적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이 해방에 대하여 우리는 크나큰 댓가를 치루었다.

스탈린, 루즈벨트, 처칠은 독일을 여러 영역으로 나누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영역은 합하여 우리가 나중에 서독일, 그 다음에는 독일연방공화국이라 하는 지역이 되었다. 러시아 영역은 동유럽, 그 다음에는 독일 민주 공화국, GDR이 되었다. 독일은 분단되었다. 하나의 민족, 두개의 나라였다. 세계 대전의 결과였고, 여기에 대해서 독일은 원죄가 있다.

서방 연합군의 지배 하에 서독은 적당한 자유 사회를 만들었고, 언론의 자유, 이동의 자유, 사업의 자유, 교육의 자유가 주어졌다. 서독은 전후 몇 년이 지나자 상대적으로 번성하였고 일종의 부유한 나라가 되었다.

소비에트연방의 지배 하에 동독은 사회적 의식이 있는 정부를 가졌지만, 언론의 자유도, 이동의 자유도, 사업의 자유도 없었다. 그 결과 수십만, 어쩌면 수백만의 여성과 남성과 아이들이 동독을 떠났다.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 숙련된 의사들, 공학자들, 노동자들이었다.

동독과 서독 사이의 국경은 대체로 열려 있었다. 그렇지만, 심각한 인력 유출은 경제의 구조 전체에 끔찍한 파탄을 초래하였다. 1961년 동독 정부는 베를린 장벽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철조망과 중무장한 경비군이 북쪽에서 남쪽까지, 발틱해에서 체코슬로바키아까지 지켰다.

갑자기 동쪽과 서쪽에 뿌리를 둔 가족들이 나뉘어졌다. 1963년 이래 서독인들 (별명: 웨시스)는 동독인들 (별명: 오시스) 가족과 친구를 방문하고 며칠간 머물 수 있었지만, 그 반대는 불가능하였다. 보통은 국경은 자기 국민을 지킨다. 이 국경에는 다른 기능이 있었다. 이것은 자기 국민으로부터, 오시스로부터 국경을 지켰다.

철조망과 장벽은 28년간 존재하였다. 여전히 사람들은 동독으로부터 도망가고자 하였다. 1961년에서 1989년까지 수천명의 여성과 남성과 아이들이 자기네 나라의 국경 경찰의 총에 맞아 죽었다. 그러나, 6백만명의 인간들이 동독에서 자기네 삶을 영위하기 시작하였다. 사회주의 제도의 지지자들이 있었는데, 최초 10년간 사회주의는 아주 스탈린주의적이었다. 거의 모든 사람을 통제하고 관찰하는 국가 경찰이 있었다. 침묵하는 다수도 있었는데, 그들은 1953년 노동자 소요를 러시아 탱크들이 잔인하게 진압하였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았고, 따라서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경제 제도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였다. 실업은 없었다. 급여는 낮았다. 동독에서는 누구도 부자가 될 수 없었다. 권위주의적인 준일당독재 국가에서 사람들은 살고 일하고 결혼하고 이혼하였다. 정상적인 가정 생활이었다. 그들은 공휴일에는 놀러 갔지만, 소련 법에 따라 당연히 다른 동유럽 국가들, 헝가리나 체코슬로바키아나 불가리아만 방문하였다.

꽤 유명한 독일의 사회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이렇게 말했다. “잘못된 사회에서 잘된 삶은 없다.” 그렇지만, 동독인들은 좋은 날도 나쁜 날도 겪었다. 친구와의 연대, 공통의 이해, 사랑과 실망도 겪었다. 잘못된 제도 하에서도 잘된 삶이 있었다. 그리고 희박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동독에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고,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지를 구속하는 정치 제도에 만족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서독은 다른 길을 갔다. 이것은 소위 자유세계의 일원이 되었다. 자유로운 노조와 독자적인 정당과 자유 선거가 있는 자본주의적 사회였다. 대기업은 정부에 크나큰 영향력을 끼쳤다. 나찌 독일의 파탄 이후 서독의 발달은 일종의 기적이라 한다. 웨시스는 세계를 탐험하였다. 그들은 아주 큰 부자가 되었다. 심지어 그들은 세계 축구 대회 챔피언도 땄다.

그러나 1980년대의 시작과 더불어 양쪽 독일 모두에서 의미 있는 평화 운동이 발발하였다. 핵 재무장은 세계를 위협하였는데, 미국의 재무장 뿐 아니라 러시아의 재무장에도 반대하는 시위가 있었다. 수십만이 서독의 본의 거리로 나왔고, 시위를 하기가 어렵고 위험한 동독에서는 수백명이 베를린 거리로 나옸다.

많은 경우 기독교도들이 시위를 시작하였다. 독일연방공화국에서는 개신교 교회가 이 운동의 핵심 중추였다. 교회 조세 제도의 결과 서독의 교회는 부유했고, 정치와 도덕 및 윤리 문제에 대한 공공 논쟁에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독일 민주 공화국에서 개신교 교회는 가난하였다. 그들은 어떤 영향력도 없었다. 정치 제도는 무신론이 이상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렇지만, 동독의 교회는 일종의 독립성을 유지하는 유일한 공공 기관이었다. 따라서 교회에서, 교회의 집회소에서, 반대자들, 젊은이들, 지성인들, 기타 시민사회의 일원들은 심지어는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함께 모이고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은 자기 문제를 토의하였고, 기도하라는 강요도 받지 않았다.

독일은 분열되었고, 개신교 교회 역시도 통일된 조직을 공식적으로 분리하는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모두 에큐메니컬 운동의 일부였다. 서독의 부자 교회들은 동독의 가난한 형제자매들을 재정적으로 도왔지만, 웨시스 기독교도들은 오시스 기독교도들을 부러워하였다. 왜냐하면, 제네바 세계교회협의회 내에서 동독 기독교인들은 상당한 기간 동안 에큐메니컬 운동의 중추였다. 그들은 가난했지만, 섹시했다. 그들이 사회주의적, 무신론주의적 환경에서 생존하는 방식은 아주 흥미로왔다. 그들의 신학자들은 아주 창조적이고 도전적이었다. 동독의 기독교인들에게 에큐메니컬 운동은 세계로의 다리였고 새로운 지평이었다. 이 점에서는 조국의 동서 갈등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1987년 무렵 소비에트의 새 지도자 미하엘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로 자신의 비전을 설명했다. 예상치 못했던 개방과 투명함이었다. 소비에트연방의 국가들은 자신의 정치적 과제에 대해 더 많은 책임을 지기 시작하였다. 헝가리는 서방에 국경을 개방하였다. 하룻밤 사이 수천명의, 대개는 젊은 가족들이 동독의 집을 떠나 헝가리로 몰려 갔다. 그들은 서방에서 더 나은 삶을 기대하였다. 그들은 자기가 소유한 작은 차, 친구, 직장, 모든 것을 영원히 남겨 두고 떠났다. 동독의 기차역에서 사람들은 부다페스트에서 프라하로, 서방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렸다. 그들은 외쳤다. “우리는 나가고 싶다. 우리는 나가고 싶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의 반대 시위도 있었다. 그들은 외쳤다. “우리는 남을 것이다. 우리는 남을 것이다.” 그들은 동독을 민주사회주의적 국가로 바꾸는 것에 일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하였다. 독일연방공화국에 대한 민주주의적인 대안을 찾고자 하였다. 혼란스러운 역사적 상황이었다. 이 새로운 운동, 즉 동독을 떠나 헝가리를 거쳐 가는 운동을 몇몇 관찰자들은 낙원으로의 도피라고 말하였다. 이상한 방식으로 이러한 묘사는 동독 내에서 동독의 미래에 대한 논쟁에 불을 지폈다.

이러한 혼동 속에서 동독의 몇몇 신학자들, 몇몇 기독교 평화 조직, 몇몇 개신교 교회들은 동독의 종말을 가져 온 평화 혁명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나는 이것을 개신교 혁명이라고 부른다. 시위자들의 애초의 목표는 더 나은 동독이었다. 그렇지만, 동독의 거의 대부분의 도시에서 더 많은 시위가 벌어지면서 독일의 통일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은 세계 극장에서의 결정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중 투표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이것은 바닥에서, 소수자가 시작한 것이었다. 1989년 동독 국가에 대항하는 시위는 모두가 개신교 교회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종국에는 8만명의 평화 시위자들이 라이프지히에 모였다. 그들은 외쳤다. “우리가 민중이다.” 소비에트 연방은 개입하지 않았다. 동독 정부는 븡괴하였고, 포기하였다.

1989119,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불꽃놀이가 작렬하였다. 동베를린에 사는 내 좋은 친구의 여덟살짜리 딸은 별로 축제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막 조국을 잃었어요.” 수백만의 오시스에게 1933년 이래 최초의 자유 선거가 19903월에 이루어졌다. 19903월 선거에 당선된 사람들은 개신교 혁명을 이끌었던 용감한 신민주주의 운동의 주창자들도 아니었고, 대안적 해방, 생태, 반핵, 평화조직을 건설한 남녀도 아니었고, 동독의 여권주의 조직도 아니었다. 승자는 서독의 정당들이었고, 그들은 동독 영토에 마치 식민주의자들처럼 진격하여 모든 것을 가졌다.

오시스 대부분은 분명히 이렇게 생각했었다. '웨시스는 돈과 경제와 모든 것에 대해 더 잘 알잖아.' 동베를린의 여류 기자가 쓴 것처럼 이것은 '낙원으로의 도피'가 아니었고, '낙원으로의 추방'이었다.

서독과 동독 사이에는 더 이상 국경이 없었다.

동독 상황에 대해 보고하는 서독의 기자로서 나는 거의 매일 국경을 넘었다. 1982년부터 1990년 동독이 끝날 때까지였다. 독일계 미국인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폴 틸리히는 그는 내가 몰래 섬기는 영웅 가운데 하나이다 이렇게 말했다. “경계 지역이야말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가장 비옥한 땅이다.” 조국과 외국의 경계, 종교와 문화의 경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경계.

다시 독일은 하나였다. 28년만이었다. 우리는 통일되었는가?

만일 당신이 오늘 동독을 여행한다면, 텅빈 거리를 볼 것이다. 사회주의 때문에 쇠락해진 구도시들은 재건되고 재생되어 아주 멋지게 변신하였다.

만일 당신이 현재 상황에 대한 독일 정부의 공식 보고서를 읽는다면, 긍정적인 설명을 보게 될 것이다. 동독의 삶의 기준은 서독의 삶의 기준에 가까와졌다. 비슷한 일에 대한 임금은 동일하지는 않지만, 서로에게 근접하고 있다. 동독의 실업률은 서독의 실업률보다 높다.

변화 과정은 계속되고 있지만, 더 낫고 더 급여가 높은 일자리는 여전히 독일 서부에 있다. 동부 지역을 개발하기 위한 연대세가 있지만, 내년이면 이 세금은 끝난다. 동독의 연금은 서독 수준을 맞추기 위해 여전히 애쓰고 있다. 과거에는 동독이 동유럽에서 가장 산업화된 나라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1990년 통일 이후 서독의 경제적으로 부강한 회사들이 동독의 산업 구조를 장악하고 파괴하였다. 이들을 재구성하는 것이 오늘날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주 큰 장벽이 있다. 한 가지 문제는 젊고 숙련된 사람들, 남성보다는 여성들이 여전히 동쪽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삶의 기준과 더 나은 급여를 제공하는 일자리와 더 편안한 환경은 아주 매력적인 대안이다. DAX-30 지수에 편입된 회사 가운데 동부 독일 회사는 단 하나도 없다. 그리고, 수많은 대기업들 가운데 동부 독일에 본사가 있는 회사는 단 하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공식 자료는 무시하자. 적어도 이제 독일은 통일되었다. 아닌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독일은 여전히 분단되었다. 독일은 정신적으로 분단되었다. 오시스 대 웨시스, 웨시스 대 오시스. 40년간의 동독체제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 영향은 일종의 수감과 같은 것만이 아니다. 국가의 냄새. 친구와의 연대의 경험. 평등한 가난. 지하신문의 창조적 삶. 자신의 작품을 출판할 수 없었던 나라의 시인과 작가들. 따라서, 그들은 입소문으로 유명해졌고, 그들의 시와 소설은 복사되어 비밀리에 나누어졌다. 저항하는 사람들은 교회 내의 평화 모임에 모였었다.

노스탤지어, 동독에 대한 신화 만들기는 심각하게 비판받았다.

따지고 보면, 동독은 독재였고, 그렇지만 사람들, 서독도 낙원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 사이에는 일종의 멜랑콜리가 있다. “외국인이라는 별칭을 경험한 사람들 말이다. 통일 이후 대학, 회사, 국가공무원 등 최고의 직업의 80%는 웨시스에게로 돌아갔다. 이는 상처와 실망과 우울을 남겼다. 한 동부 독일의 정치 비평가가 말했듯이 과거 러시아 영역은 이제 희생 영역이다.

따라서, 몇몇 오시스는 우리의 정체성이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동독 이야기, 우리 이야기를 새롭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웨시로서 나는 이 점을 아주 잘 이해한다.

그러나 정치적 발전에 대한 대규모의 실망, 특히 중앙 정부의 피난민 정책에 대한 우려로 말미암아 독일에 온 아주 많은 수의 이민자들과 동부에 있는 사람들이 민주적 정당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우익과 극우 극단주의자들에게로 넘어간다. 그것은 아주 위험하다. 우리는 이런 현상이 아주 많은 나라에서 생기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 독일에서, 우리의 역사를 보면, 새로운 민족주의, 새로운 인종주의, 새로운 반셈주의는 새로운, 그렇지만 오래된 내부의 적의 징표이고, 그늘이다.

따라서, 당연한 말이지만, 무엇이 진짜로 잘못되었는지를 알고, 상처를 치유하는 법을 알기 위해서는 그들의 목소리야 말로 독일에서 진리와 화해 절차를 요구하는 목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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