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세계평화대회 국제심포지엄 발표 2
2018. 10.29, 인천하버파크호텔
평화를 건설하는 사람들 - 종교간 경험의 맥락에서
존스턴 맥매스터 박사(Dr Johnston McMaster)
2. [발표2] Johnston McMaster.pdf
* 급한 일정으로 인해 일부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영문 자료를 본 텍스트로 참고해 보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보고서를 발간하며 수정보완하여 제공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의 맥락은 아일랜드이며, 수세기에 걸친, 그리고 최근의 폭력 갈등 기간 동안 아일랜드에서 기독교 전통의 지배를 고려하여 이 글에서는 평화 건설 과정에서 교회의 역할에 대하여 개관하고자 한다. 요즘에 와서야 기독교 전통의 지배가 후퇴하였으며 아일랜드는 더욱 세속화되었다. 그리고 이제야 세계 종교들 사이의 종교간 대화가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아일랜드 평화 건설 과정에서 종교간 경험은 교회간 경험이라는 뜻이다.
시민 종교의 역할
12세기부터 아일랜드에서 종교는 정치 및 권력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아일랜드의 대형 교회들은 두 차례의 식민 침략, 정치적 침략과 형법으로 가톨릭과 장로교를 억압하던 시절에 그 기초를 두고 있고 18세기에 개신교가 최고조에 달하였다. 아일랜드에서 교회는 정치적으로 전혀 중립적이지 않으며,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신학을 옹호하지도 않았다. 백년전 가톨릭이라는 것은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라는 뜻이었고, 대영제국으로부터의 독립과 진정한 아일랜드인이 되는 것을 원한다는 뜻이었다. 개신교도라는 것은 유니온주의라는 뜻이었고, 대영제국 연방에 잔류하고자 하였으며 자기 정체성으로 영국인이고자 한다는 뜻이었다. 영국 정부가 아일랜드에 세 번째로 제국 내에서의 고향법 (Home Rule)을 제정하고자 하였을 때, 가톨릭 교회는 이러한 고향법을 전적으로 지지하였다. 개신교 교회는 고향법을 완전히 반대하였으며 그 지도자들은 약속 (Covenant)에 서명한 최초의 7인에 속해 있었다. 약속이란 고향법에 저항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강구하겠다고 약속하는 엄격한 정치종교적 문서이다. 모든 수단이란 총기와 물리적 힘을 뜻하였다. 물론, 가톨릭이면서 유니온주의자였던 개인도 있었고, 개신교도이면서 민족주의자인 개인도 있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과 기관은 정치적으로 그렇게 연계되어 있었다. 이는 1921년 아일랜드의 분리 이후에도 여전히 그리하였으며, 상대적으로 최근까지도 그리 많이 변하지 않았다. 우리의 종교는 시민 종교, 즉 반대파 정치와 동일시되는 종교, 국기와 국가의 종교, 그리고 일종의 민족주의와 구분되지 않는 종교이다. 시민 종교는 평화 건설에 그리 강하지 않다.
갈등과 모호한 교회
가장 최근의 갈등 국면은 50년 전 1968년 10월 5일 시작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약 30년 동안 이 국면은 지속되었다. 1960년대에는 공동체 관계가 개선되는 것으로 보임에 따라 희망찬 시대였다. 몇몇 긍정적인 운동이 생겼고, 북부 아일랜드가 더 나은 곳이 될 것으로 보였다. 그렇지만, 이것은 거짓된 새벽이었다. 도입된 변화는 너무 적었고 너무 늦었다. 가톨릭과 개신교, 유니온주의와 민족주의자들 사이의 분열과 문제는 너무 깊었고, 심각히 구조적이었으며 체계적이었다. 1960년대 교회는 변화에, 적어도 관계의 층위에서 영향을 끼치고자 하였다. 신학적, 에큐메니칼적 대화가 증가하였고, 개신교와 가톨릭의 화해를 위한 시도가 있었으나, 종교적 반대의 목소리는 크고 위협적이었다. 교회는 중요한 성명을 연이어 발표하였다. 신조와 인종과 피부색에 따른 모든 형태의 부정의, 불평등 또는 차별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1967년 개신교와 가톨릭 교회의 지도자들은 공동으로 새해의 평화를 위한 호소문을 출간하였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선언은 아일랜드의 장로교 교회에서 나왔다. 이 선언은 장로교도들에게 가톨릭에 대한 어떤 태도나 행동에 대해서도 용서를 구할 것을 요청하였고, 이해관계와 충성과 믿음의 충돌에 대해 해소할 것을 호소하였다. 1965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장로교는 다시 이런 일을 반복하지 않았고, 다른 교회에게 용서를 호소하는 일도 없었다.
1968년 인권운동이 조직되었을 때 대부분은 가톨릭 중심의 운동이었다. 당연히 가톨릭이든 노동자 계급 개신교도이든 인권은 필요하였다. 개신교도 경찰들이 인권 행진을 폭력적으로 진압하였다. 가톨릭 교회는 인권운동을 온전히 지지하였고, 그 조직을 보호하였다. 개신교 교회들은 여기에서 소요만을 보았으며, 북부 아일랜드의 친유니온주의자이자 일당지배주의자로서 바울서신 로마서 13장을 들어, 지배자는 신이 임명한 것이며 복종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인권운동은 폭력의 영향으로 쇠퇴하였으며, 1970년대에 들면서 북부 아일랜드는 폭력의 악순환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교회는 폭력을 비난하였지만 무시당하였고, 교회 지도자들은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최악의 살해는 1970년대 초에 발생하였다. 몇몇 정치적 운동이 있었지만, 어떤 것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30년 이상의 폭력적 갈등 동안 교회가 한 역할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교파는 자신의 정치 공동체를 반영한다. 교회는 비난의 정치에는 아주 강했지만, 폭력적 갈등에 대해 어려운 분석을 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살인을 선별적으로 비난하였고, 반대편을 더 비난하였으며, 자기편은 덜 비난하였다. 폭력에 대해서는 모호한 태도를 견지하였다. 교회와 공동체 사이의 관계도 모호하였다. 사회를 위한 공통의 비전은 없었다. 자기 비판적 평가 또는 자기비판은 없었다. 교회는 폭력의 피해자들에게 사목하였지만, 정치적 맥락에서 그렇게 하였다. 교회는 자기가 속한 종파의 사목이었다. 폭력의 기간 동안 교회는 문화적, 정치적으로 포로였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평화를 만들기 위해 투쟁하였다. 교회는 폭력에 대하여 모종의 견제를 하였고, 교회의 영향력이 없었더라면 폭력은 훨씬 더 심했을 것이라고 하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말을 평가하거나 교회의 영향력을 양적으로 가늠하기는 어렵다. 1968년 그들은 폭력에 사로잡혔다. 종전이 선언되었을 때, 교회에 속한 개별 신자들은 반대자들 사이에 대화와 담화를 시작하는 데 큰 영향력을 끼쳤고, 평화 협상을 이끌었으며, 무기와 폭발물을 수거하는데 독립적인 중재자 역할을 하였지만 기관으로서 교회는 평화에 결박되었다.
화해의 문제는 무엇인가?
기독교 전통에 속한 많은 개인들이 평화 만들기, 평화 건설에 개입하였다. 몇몇은 평화 조직과 집회를 만들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공동체 내에서 다리를 짓는 일을 열심히 수행하였고, 또 다른 사람들은 용서와 치유의 몸짓과 행동으로 다른 사람에게 다가갔다. 교회 지도자들은 평화와 화해를 위한 공동 선언문을 작성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무장해제 또는 과거 문제를 해결하는 조직에서 봉사하거나, 폭력의 피해자들에게 어떻게 다가갈지에 대하여 숙고하였다. 이전의 전투원들이 평화 과정의 영광을 누리고자하는 사회에서 하지 못한 이야기가 많고, 그 중 몇몇은 영원히 하지 못할 것이며, 또 각광을 받지 못한 영웅도 많다. 그렇지만, 교회는 평화 건설과 화해의 문제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현재의 교회가 가진 문제는 문화적으로 조직은 해체되고 권한은 사라지고 있으며, 아일랜드의 교회와 국가의 분리라는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아일랜드식 기독교 왕국은 끝에 도달하였으며, 교회는 교회와 국가, 신앙과 정치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기 위해 고심하였다. 그들은 교회적 경건 또는 종교적 경건으로 후퇴하였거나, 이 문제로부터 도피하였다. 어떤 이는 성적, 개인적 도덕성에의 집착이야말로, 거대담론인 공적, 사회적, 경제적, 환경적, 사회적 평화와 화해의 도전으로부터 도피하는 유일한 방법이며, 또한 가족과 교회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모든 과정에서 심각한 신학적 결함이 노출되었다.
최근 아이리시 스쿨 오브 에큐메닉스(Irish School of Ecumenics)는 아주 포괄적인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 연구에서 밝혀낸 것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대부분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화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것이 교회 목회의 아주 중요한 일부분이라고 믿었다. 화해에 대하여 좀 더 설명해 달라고 하자, 답을 한 사람 대다수는 화해는 수직적인 것, 즉 개인과 신의 화해라고 대답하였다. 화해에 수평적 차원이 있는지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묻자, 이것은 사람들 사이의 문제, 즉 둘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 사이의 문제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특별한 것은 없다. 이것은 가장 잘 알려진 화해의 신학으로 언제나 알 수 있고, 인지할 수 있는 관점이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유럽 계몽의 후손이고, 이 말은 우리가 신학과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사용하는 해석의 틀로 우리는 강한 개인주의 문화를 채택하였다는 것이다. 이 조사가 분명히 한 것은 우리는 개인 간 차원까지 포함한 개인주의에 너무나도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개인적, 개인 간의 화해의 문제로부터 사회적 화해의 문제로 넘어가기가 아주 어렵다는 점이다. 공공영역에서 화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는 문제는 일반적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우리는 공공신학에 대해 고심하고 있으며 그 일부는 바로 사회적 화해에 대한 고민이다. 이는 개인적, 개인 간 화해와는 아주 다른 동학을 가지고 있다.
이 연구는 아일랜드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 목회자와 평신도들은 개인과 신과의 화해 및 둘 이상의 사람들 사이의 화해에 대해서는 아주 강한 의견을 가지고 있지만, 사회적 화해의 문제에 대해서는 심각한 이해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간극을 메우는 방법을 모르거나, 아니면 심지어는 메워야 하는 간극이 있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고 있거나, 또는 사회적 화해는 교회의 사목의 핵심 부분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종교기관이 과거 한 때 유지하였던, 특히 백년 전 1912년에서 1922년까지의 중차대한 갈등과 폭력의 십년 동안 유지하였던, 공적, 정치적 권력을 잃은 사회, 즉 세속적, 다원적, 민주적 사회에서 공공 신학이 처한 더 큰 과제의 일부인 것이다.
사회적 화해는 구조적 불평등과 권력의 불균등의 문제를 직면하고 이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문제이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아일랜드 뿐 아니라 세계 다른 갈등에 직면한 지역들에서 화해의 문제와 관련하여 직면한 커다란 간극이며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사회적 화해는 이처럼 아주 다른 동력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의식적으로 이 문제를 직면하고 유럽식 계몽주의적 개인주의라는 우리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신학을 하고, 성서를 읽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다른 해석학적 열쇠, 다른 독서 전략, 다른 해석 방법이 필요하다. 그 열쇠는 여기에 있다. 이것은 우리의 가장 중요한 문서인 성서를 심각하게, 사회정치적 텍스트로 읽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성서 자체를,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제국의 그늘에서 쓰인 책이며, 지배 시스템이 계속 이어지는 와중에 소수자들이 신앙적으로, 윤리적으로 살고자 노력하는, 또는 구조적 불평등과 권력의 불균등의 맥락에서 쓰인 책이라는 점을 인지하는 것이다.
평화 건설자가 되기
만일 아일랜드 교회가 평화 건설에 중요한 기여를 하고자 한다면, 교회는 함께 사회적 화해의 신학을 개발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에는 교회의 기초가 되는 문서를 읽을 때 다른 해석학적 열쇠, 다른 독서 전략이 필요하다. 히브루-기독교 성서에는 사회정치적 배경이 있으며, 그 주된 맥락은 지배 왕국 또는 강대국이다. 정치적 부정의, 경제적 억압과 군사적 폭력은 어느 페이지에나 있다. 아일랜드의 교회는 성서를 다시 한 번, 마치 맨 처음으로 읽는 것처럼 읽을 필요가 있다. 이러한 해석학을 통해서만 교회는 사회적 화해의 신학과 실천을 형성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것으로, 동일한 해석학을 활용하는 것은 공공신학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도전이다. 공공신학은 우리 시대의 중대한 공공적 도전과 질문과의 관계에 적용되는 응용 사회윤리학이다. 이들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환경적, 문화적 문제이며, 빈곤과 폭력과 전쟁과 부정의와 세계화와 지정학과 성적 정의의 문제이다. 공공 신학을 한다는 것은 이들, 그리고 또 다른 거대한 공공의 지역적, 세계적 문제에 사회윤리학을 적용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공적 문제에는 평화 만들기, 평화 건설, 사회적 및 통합된 화해의 문제에 정의로운 평화의 문제이다. 아일랜드 교회의 미래는 공공신학이며, 이것이 없다면 미래는 없다. 이것은 공동의 선을 위한 신학이다. 이것은 신학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껴안아야 하는 미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