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세계평화대회 국제심포지엄 발표 4.
2018. 10. 29. 인천하버파크호텔
사회 변혁에 있어 소외된 사람들의 역할과 비전 세우기
맥스 에드거
* 급한 일정으로 인해 일부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영문 자료를 본 텍스트로 참고해 보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보고서를 발간하며 수정보완하여 제공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사회생활 경험의 거의 대부분을 비공식적인 소외 그룹과 함께하며 정의로운 평화를 위한 사회 운동에 몸 담아왔습니다. 여기에는 농촌의 가난한 소작농, 토지권을 두고 싸우는 빈민 공동체, 폭력과 전쟁으로 인한 희생자와 난민 등이 포함됩니다. 저는 평화와 정의가 살아있는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상향식 접근법(bottom-up approach)을 써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또한 저는 소외된 사람들이야말로 평화 건설의 중심 주체 가운데 하나라고 확신합니다. 오늘 저는 저의 경험을 통해 배운 교훈 몇 가지와 종교를 초월하여 청년들과 일을 할 때 이러한 교훈을 어떻게 적용했는지, 그리고 인종적, 종교적 폭력에 직면했을 때 그 교훈들이 어떻게 도움이 되었는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공정하고 평화로운 공동체 건설 과정에 있어 ‘소외된 사람들이 의미 있는 주체로서의 역할’을 주제로 한 저의 발표가 약간의 도움이라도 되기를 바랍니다.
1960년대 미국은 베트남과 전쟁을 했습니다. 당시 저는 저희 대학을 중심으로 했던 반전 운동에 깊숙이 관여하였고 평화클럽(Peace Club)의 적극적인 회원이었습니다. 대학신문에 전쟁을 반대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교회 조직인 메노나이트 중앙위원회(the Mennonite Central Committee)와 함께 베트남에 가서 난민들을 돕는 일을 했고, 베트남 국민들에 대한 그 부당한 전쟁의 실상을 글로 쓰기도 했습니다. 저는 1971년부터 1976년까지 베트남에 있었습니다.
저항운동을 하는 세월동안 수만 명이 미국전역(그리고 세계)에서 한 목소리로 전쟁 그 자체와 전쟁을 부채질하는 기득권층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었습니다. 사람들이 대학 캠퍼스로 모여들었고 백악관 앞에서, 수도인 워싱턴 DC에서, 또 전국 각처에 흩어진 도시의 거리에서 행진하고, 함께 노래하며 새로운 사회를 외쳤습니다. 참으로 고무적인 시대였습니다. 에너지가 충만했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결의는 굳건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76년 4월 30일 마침내 전쟁은 끝이 났고 곧이어 미국의 강제 징집도 종식을 고하게 됩니다. 여차하면 곧바로 모여들 것만 같았던 사회 변화를 위한 거대한 운동이 점차 수그러들었고,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가 가족을 부양하고 월급을 벌고 안락한 삶을 위해 노력하는 현실이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물론 그 투쟁을 떠나지 않았던 사람들도 있었고 오늘날까지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몇 년이 흐르고 난 후 시카고에 사는 활동가 친구를 찾았을 때, 그는 저에게 도시에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투쟁의 현장을 보여주었습니다. 한 군데는 가로수가 줄지어 서 있고, 세련된 커피숍과 잘 관리된 아파트 단지가 있는 아름다운 동네였습니다. 저를 이곳에 데려온 까닭이 이해되지 않아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여긴 전에는 빈민가였어.” 그가 대답했습니다. “성공지향적인 청년들이 여긴 땅값이 싸고 오래된 건물들이 나름대로의 개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지. 그들은 그곳에 살던 빈민들을 쫓아내고 자신들의 호화로운 생활터전을 위한 커뮤니티로 이곳을 재개발했어.”
“돈 없는 사람들을 쫓아내고 거주를 위한 새로운 커뮤니티를 만든 사람들이 누구지?” 제가 물었습니다.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가 전쟁, 현상유지, 인종차별, 그 밖의 모든 불의에 반대해 시위를 할 때 우리와 나란히 행진하던 바로 그 사람들이야. 그들은 이제는 자신들이 반대해 싸웠던 바로 그 세력이 되어버렸어.”
충격적이었습니다! 사회정의를 부르짖던 우리의 그 강렬했던 운동이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타락할 수 있었을까? 이것이 공정한 평화가 있는 사회를 위한 운동은 왜 오래도록 지속되지 못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찾고자 했던 출발이 되었습니다. 만약 내가 그 답을 찾을 수 있다면 나는 훨씬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운동을 할 때 흔히 하는 말이 있죠. “그냥 바쁘게 다니지 말라. 효과적으로 일하라!” 저는 효과적이길 원했습니다.
그 해답을 찾고자 저는 아프리카의 브루나이, 아시아의 베트남, 태국, 홍콩 등에 있는 선구자들을 찾아 나섰고 지금은 캄보디아에 있습니다. 그동안의 여정에서 저는 많은 스승을 만났습니다. 절대빈곤 상태로 살고 있는 사람들, 홍등가로 명성을 떨치는 방콕의 팻퐁가 (Pat Pong Street)에서 일하는 남자, 여자들, 슬럼에 살고 있던 사람들, 공장 노동자, 농촌 소작인, 난민, 전쟁 희생자들이 그분들입니다.
그분들은 저에게 가난한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그들에게 말을 하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분들은 평화를 이루는 새로운 이론이나 모델을 소개하지 말고 그들이 이미 갖고 있는 것에서 시작하게 이끄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습니다. 그 분들은 그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마음속을 모두 드러내는 것이 빈민과 억압받는 사람들의 신뢰를 얻는데 필수적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은 단지 노동력으로서 아니라 주체로서 동등하게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또한 그분들에게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만약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해도 변화에 대해 진지하지 않다면 사회는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변화는 저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며, 저는 먼저 그 책임을 감당할 용기를 가져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변화를 전환(transformation)이라고 하겠습니다. 전환은 현재의 내 모습에서 시작해 되어야만 하는 나를 향해 철저하게 움직여 나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스스로를 전환시켜가면서 저는 세상을 변혁하기 위해 억눌린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파울루 프레이리 (Paul Freire)는 우리가 현실을 경험하고, 그 경험을 깊이 성찰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하기 위해 행동할 때에만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것을 행동/반성 프락시스(praxis실천)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우리가 사회 변혁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이론이나 모델이 아니라 스스로의 행동을 성찰함으로써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이 겪는 현실의 삶을 경험하고 그것을 성찰함으로써 배우고 변화해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의 삶의 경험을 돌이켜보고 그 경험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의 자리에서 박차고 나와 불의와 고통이 가득한 세상으로 들어가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러한 행동이 있어야만 고통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깊이 성찰하고 불의를 만드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뿌리를 변화시키기 위해 오랜 시간에 걸쳐 일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행동과 반성의 프락시스는 우리의 경험과 교훈을 기초로 해 새로운 행동으로 이어지고 그 다음에 새로운 반성이 따르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의 지속적인 과정입니다.
파울루 프레이리 (Paulo Freire)는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사회적 현실에 대한 자각을 일깨우기 위해 함께 대화를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성찰을 하고 이를 통해 다음의 행동을 변화시키고 이에 따르는 비판적 반성을 지속해 나가기 위해서는 그들이 자신의 환경에서 행동할 수 있도록 반드시 함께해야 합니다.
정의로운 평화(just peace)의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이 어려운 과업을 맡고자 하는 청년 활동가들을 격려하고 지원하는 일을 하면서 제가 지금 깨닫고 있는 것은 첫 번째 중요한 발걸음은 스스로 변화하겠다는 의지가 그들 안에 충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태도, 불의에 대한 그들의 접근 방식, 향후에 그들이 집중하고자 하는 과제, 사회에 다른 계급과 그들이 맺고 있는 관계 등 다방면에서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됩니다. 이러한 종류의 변화는 우리가 청년들에게 변화해야한다고 말한다고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우리들이 그들의 머릿속에 사회 변혁에 위한 이론과 모델을 가득 채워 준다고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청년들이 직접 행동/반성이라는 일련의 긴 과정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들은 생존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과 동일하게 사고할 수 있게 되고, 그들 스스로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를 깨달을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됩니다.
제가 배운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은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희생자가 아니라 억압하는 세력과 구조에 맞서 싸우는 투쟁에 적극 참여하는 가장 중요한 실행자라는 것입니다. 1990년대에 저는 버마에서 전쟁 희생자들과 많은 일을 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수십만 명에 달하는 토착 농민들이 난민 캠프 접경까지 쫓겨 가거나 혹은 국내실향민 (internally displaced persons (IDPs) 상태가 되어 군대를 피해 밀림 속으로 깊이 숨어버렸습니다. 한번은 카렌족(Karen) 마을의 몇 사람과 얘기를 하는 가운데 제가 국내실향민 (IDPS)이 전쟁의 희생자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그 말을 할 때 한 카렌족 청년의 얼굴에 동요의 빛이 완연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절망에 차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IDPS를 전쟁의 희생자라고 말하지 마세요. 그들은 희생자가 아닙니다. 밀림 속에 숨어 지내면서 그 사람들 나름의 방식으로 군대가 자신들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싸우고 있는거에요. 그 사람들 나름의 싸움의 전통이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어요. 그들이 싸우는 과정에 간섭하지 말고 차라리 그것을 지원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해요”
이 말은 저에게 도전이 되었고 군부 압제에 짓밟히고 있는 이 사람들을 내가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대해 더욱 신중하게 살피고 내가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을까, 아니면 그들의 투쟁에 걸림돌이 되었을까를 신중하게 따져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는 ‘그들이 자신들의 투쟁에 나를 합류시킬 수 있을 만큼 내가 그들을 이해하고 있으며 과연 그들의 신뢰를 얻었을까?’를 반성했습니다.
현재 저는 소외된 청년들과 함께 있습니다. 저는 더 이상 갈등 전환(conflict transformation)에 관한 최신 이론을 소개하거나 평화정착(peacemaking)에 관한 가장 유명한 모델을 소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겪어온 경험, 그들의 역사, 그들의 문화, 그들의 종교적 전통으로 돌아가 그들의 공동체의 삶의 경험의 일부인 비폭력 투쟁의 가장 좋은 형태를 찾아내라고 격려해줍니다. 그 자리가 바로 그 청년들이 그 나라 사람들이 이해하고 자신 있게 동참할 수 있는 투쟁의 방법을 모색하는 출발점일 것입니다. 다른 말로 그들은 종교를 초월한 정의로운 평화(interfaith just peace)의 공동체 건설을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갖추고 있다는 뜻입니다. 일단 그들이 자신의 공동체의 경험과 지식에 굳게 뿌리를 내리면 그 민족만이 갖고 있는 정의로운 평화(just peace) 프로세스를 무너뜨리지 않고서도 다른 모델과 이론으로부터 배우고 유익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방콕의 유명한 홍등가에서 일하는 남성들과 여성들로부터 제가 배운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은 나와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삶의 경험을 가진 사람을 돕고 싶다면 그들과 공감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감은 우리 대부분에게 무척이나 어려운 과제입니다. 태국에서는 공감을 다른 사람의 마음을 떼어내 자신의 마음속에 넣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제가 어떻게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인생을 사는 사람들, 매춘하는 여성의 마음, IDP의 마음, 성소수자(LGBTQ)의 마음, 예멘의 전쟁 피해자 어린이의 마음, 강간당한 여성의 마음, 소년병의 마음을 떼어내어 제 마음속에 넣을 수 있을까요?
제가 함께 하고 있는 프로그램에서 저는 참가자들에게 자신의 공동체로 돌아가 소외된 공동체와 소외된 개인들과 의미 있는 시간을 갖기를 권장합니다. 이것은 여러 일 동안 빈민촌에 들어가 그 곳에 사는 아이들과 게임을 하고 간식을 나눠주는 것보다 훨씬 진지한 것입니다. 이것은 홍등가에서 일하는 여성을 인터뷰하고 그 후에 기고문을 쓰거나 그들에 관한 책을 쓰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헌신이 필요한 일입니다. 이것은 정부 관리의 부정을 비난하는 성명서에 서명하거나 예멘이나 이라크에서 벌어진 전쟁에 반대하는 시가행진을 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헌신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억압받는 사람들과 공감하는 힘을 기르고 싶다면 우리는 그들과 연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경청하고 그들이 살면서 겪어온 고통을 느끼기 시작하는데 필요한 시간, 동정이 아니라 진정한 공감이 시작되는데 필요한 시간을 기꺼이 내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정의와 평화가 우리 공동체와 우리가 사는 세상에 확고히 자리매김했다고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 이 운동을 계속해 나가기 위한 방법을 찾는데 이러한 교훈은 어떤 도움이 될까요?
앞에 나눈 경험과 그 밖의 많은 다른 경험을 통해 이제는 억압받는 사람들과 효과적으로 일할 줄 알고 지치고 실망할 때에도 이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 평화 운동가를 양성하는 비결을 한 단어로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전입니다.
우리들 스스로, 또 우리의 사회적 정의 운동에 있어서 어디를 향하고자 하는 지에 대한 심도 있고 세부적인 비전을 수립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잠언 29장 18절에서 솔로몬 왕은 비전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지금의 저는 1960년대의 우리가 추구했던 평화와 사회변혁운동은 쇠퇴했고 이는 비전이 아니라 꿈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세계 평화를 위한 꿈, 탐욕과 오만에 의해 통치되지 않는 사회를 꿈꾸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평화의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혹은 새로운 사회는 무엇에 기초를 두고 만들어져야하는지에 대해 분명히 알지 못했습니다. 베트남전쟁으로 인해 느낄 수 있었던 압력이 끝났을 때, 번영과 안락한 삶을 향해 갈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이 떠오르기 시작했을 때 꿈은 쇠락했고 너무도 많은 경우에 그저 끝이 났습니다.
만약 평화와 정의를 향한 우리의 운동이 역동성을 잃지 않고, 희망과 결단의 불꽃이 사람들에 마음속에 사라지지 않고 꽃피우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마음속에 품은 꿈을 우리 정신가운데 지켜지는 비전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그 비전이 우리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에 대해 마치 청사진과 같이 그 건물의 완성을 위한 구체적인 다음 단계는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아주 명확하고 상세한 그림을 펼쳐 보일 것입니다. 이것은 학술적인 과정이 아닙니다. 이것은 되돌아서서 다시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게 하는, 우리의 정신에 영향을 주는 강렬한 마음의 훈련 과정입니다. 우리는 비전을 생각하면서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게 될 것이며, 우리는 억압받은 사람들의 곁에서 그들 중 하나로 함께 우리의 비전을 향해 나아가도록 돕게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음을 가르치지 않고 정신을 교육하는 것은 절대 교육이 아니다.” 마음을 가르치는 것은 우리에게 꿈을 줍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꿈이 머리에서 출발해서 마음에 도착하게 되면 그것은 비전이 됩니다. 비전은 우리가 변화될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우리 자신의 변혁,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불의에 대한 변혁으로 이끌어 줍니다.
만약 소외된 사람들이 평화 구축에 중요한 구성요소중 하나라면 우리는 그들과 더불어 일해야 합니다. 또한 스스로 변화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자리 잡은 비전을 키워나가는 일에는 만기일이 없습니다.
저는 비전을 키워 가는데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우리는 많은 새롭고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마음에 채우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그 시간을 단축시킬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천천히, 한 단계씩 나아가야 하며, 소외된 사람들이 행동하고 반성하면서 성장해서, 자신들의 현실을 보다 명확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에 찬 과정을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우리들 스스로는 이 소외된 사람들과 충분한 시간을 같이 지냄으로 그들의 고통과 분노에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가 되어야만 비로소 우리는 그들과 공감할 수 있게 될 수 있을 것이며 희생자로서 그들을 이끄는 것에서 벗어나 그들과 함께 변혁의 과정에 중요한 실천가로서 그들의 싸움에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청년들이 새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향해 우리를 이끌어 줄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구세대의 경험 뿐 아니라 새로운 세대의 이상주의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서로 존중하면서 동시에 하나의 팀을 이루어 모두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소외된 사람들과 더불어 굳세게 서서, 특별히 소외된 청년과 함께 정의가 함께 하는 진정한 평화를 위한 싸움을 계속하기를 간절히 촉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