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독립운동에서 지구시민사회 생명평화운동으로
1. 자주와 개화의 상징, 한국YMCA운동의 탄생
한국YMCA는 구한말 열강의 침탈야욕으로 인해 겨레의 앞날을 가늠하기 어렵던 참으로 어둡던 시기에 민족의 자주와 개화를 갈망하던 청년들의 열정이 거름이 되어 탄생되었다. 1901년 배재학당YMCA를 시작으로 1903년 10월, “황성기독교청년회”, 1914년 4월,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를 창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쇄국으로 국제정세에 어둡고 정쟁으로 민중의 삶이 외면되어 쇠잔하는 국운에 이 겨레가 소망을 잃어갈 즈음, 교육․계몽․선교의 기치로 YMCA가 개화구국운동에 새 지평을 열게 된 것은 민족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2. 근대 개화청년들의 구심, 청년들에 의해 시작되다.
한국YMCA운동은 청년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당시 개화, 자주, 민주의 기치를 높이 들고 독립협회를 결성하였던 일단의 개화청년 지도력들이 강제해산과 투옥 등 좌절의 과정을 거쳐 YMCA 운동에 합류함으로써 한국 YMCA운동이 형성, 확산되었다. 옥살이에서 풀려나온 독립협회계 인사들 즉 이상재, 홍재기, 김정식, 이원긍, 유성준, 안국선 등이 연동교회에 입교한 다음 청년회에 가입하였고, 또한 옥살이에서 풀려난 이승만과 학생운동가 신흥우도 YMCA운동에 합류하였다. 그리고 원산감리의 격리생활에서 풀려나 서울에 돌아와 있던 윤치호와, 미국유학에서 돌아온 김규식도 이들과 함께 YMCA에 가담하였다. 이와 같은 개화청년들이 독립협회를 대신하는 새로운 개화의 구심력으로 YMCA 운동과 만남으로써 비로소 주체적 한국YMCA 운동의 시대가 열릴 수 있게 된 것이다.
3. 근대 문물의 산실, 근대 교육과 체육의 시작
초창기 YMCA의 역점사업은 실업교육과 선교 및 체육활동이었다. 먼저 실업교육으로 1904년 가을부터 인사동(태화사회관 자리)에 마련된 임시회관교실에서 시작된 1주 3일의 야학은 150명 가량의 학생들이 수강하는 대단한 성과를 올렸으며, 선교활동으로는 1907년 이후 종교위원장 이상재의 헌신적인 지도로 한해에 754명이 입신을 선서하는 기록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만국기도일’에는 1,200명이 넘는 청년들이 YMCA강당에 운집하여 ‘구원의 말씀’을 들었다. 그리고 체육활동으로는 1907년에 농구, 1908년에 스케이트, 1916년에 배구를 각각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도입하여 보급하였다.
4. 청년 지도력의 산실, 민족과 함께한 YMCA
YMCA운동이 시작된 이후 10여년 간 국내적으로는 1904년 2월 ‘한일의정서’,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 1910년 8월 ‘한일합방조약’ 등이 강제 체결되는 수치를 당하고 우리 민족은 급기야 나라 잃은 민족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 막 그 싹을 틔운 YMCA로서는 이에 조직적인 저항력이 없었으므로 민족계몽을 통한 국권회복의 미래를 준비하게 되었으나 일제는 YMCA의 이러한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감시를 강화하였다. 1907년 ‘헤이그 밀사파견’의 주동인물인 이준, 전덕기, 이상재는 YMCA와 깊은 관련을 가진 인사들이었다. 이에 일제는 1910년 ‘105인 사건’이라 불리우는 데라우찌 총독 암살기도 조작시나리오를 통하여 YMCA 지도력에 커다란 상처를 입혔다. 105인 사건을 계기로 해서 윤치호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이승만과 김규식은 망명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YMCA 회원들을 매수하여 황성기독교청년회를 일본YMCA의 통제 하에 두려고 하였던 ‘유신회’사건 또한 YMCA를 전복시키려는 일본의 음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YMCA는 1910년 이후 ‘하령회’를 통해 청년들을 깨우쳐 민족정신을 불러 일으켰다. 3.1독립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한 2.8독립선언이 동경의 한국YMCA 회관에서 발표되었을 뿐만 아니라, 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는데 그 중 YMCA 관련인사가 학생YMCA 간사 등을 포함하여 9명이나 되었다. 1920년대에는 일제치하에서 점차로 잠식되고 있는 민족경제의 소생운동으로서 물산장려운동을 벌였으며, 1925년부터 시작된 농촌운동은 피폐한 농촌을 개발하고 복음을 전파하여 농민의식개혁과 농업발전에 대단한 영향을 미쳤다. ‘경제적 자립과 정신적 소생, 사회적 연대와 협동’를 기치로 당시 인구의 90%를 차지했던 농촌에서 시작된 협동조합운동은 지금까지 협동운동의 모델이 되고 있으며, 한국의 간디로 불리는 조만식에 의해 추진되었던 물산장려운동과 학교설립운동은 자립경제와 자치운동의 시초가 되고 있다.
이와 같이 YMCA는 ‘2.8독립선언’, ‘3.1독립운동’의 청년 지도력을 배출한 민족독립운동의 산실이자, 교육기관, 민간사회단체, 대한체육회 등 체육기관, 에큐메니컬 교계 기관 등 근대 시민사회 형성의 모체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애국애족운동의 전통은 YMCA의 정체성을 강화시키고 사회적 신뢰를 구축한 찬연한 성과로서 언제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려는 YMCA의 운동적 의지발현이었다.
5. 민족에서 지구시민으로, 생명평화의 바람 YMCA
YMCA는 해방 이후 한국 사회 재건과 시민사회 형성을 위한 청소년 지도력 육성, 양곡은행 및 협동조합을 통한 농촌계발사업과 노동자/농민 지도자 교육, 시민논단 및 민주시민교육, 어린이에서부터 성인까지의 사회교육, 소비자 상담 및 구제활동(시민중계실 소비자운동) 및 시민자구운동, 향락문화 및 과소비추방운동, 환경보전운동, 공명선거운동 및 시민자치 정치개혁운동, 자원재활용운동, 경제위기극복을 위한 금모으기운동, 실업위기 극복운동, 먹거리나누기운동, 사회체육운동, 사회복지운동 등 시대변천에 따라 우리사회의 공동관심사에 적극대응하고 각종 활동을 활발히 전개함으로써 선한 공동체를 지향하는 YMCA 본분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또한 90년대 이후 21세기 새천년을 맞이하여 ‘꿈꾸는 젊은이, 함께 가꾸는 지역사회, 평화로운 지구촌’을 비전 슬로건으로 ‘한반도 평화를 위한 북한평화 민간협력운동’, ‘환경과 생태마을 만들기 및 지도자 교육’, ‘지역과 마을만들기 운동’, ‘공정무역운동’,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운동’ 등 상생과 평화의 삶을 만들기 위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특별히 2014년 4월, 한국YMCA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시아와 지구촌의 정의로운 평화’를 새로운 비전으로 하여 ‘아시아 평화교육기관으로 생명평화센터 건립’, ‘대북민간협력 국제기구 설립’, ‘상생과 협동의 지역사회와 도농간 생명의 고리 만들기’, ‘자살없는 학교와 평화학교 만들기 등 생명평화의 바람 꽃 청소년 육성’ 등 8대 기념사업과 10대 비전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통해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시민사회에 ‘생명의 물결, 평화의 바람’을 만들고 새 시대가 요구하고 기대하는 바에 적극 응답함으로써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YMCA전국연맹 창립 100주년위원회>
<한국 최초의 야구단, 황성기독교청년회 야구단, 1920년. 야구단을 통해 청년의 단결과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고자 하였다>
<이상재, 윤치호 선생을 비롯한 창립초기 YMCA 지도자들>
<3.1운동의 주역을 배출했던 한국 최초의 학생 하령회, 1910년>
<YMCA를 통해 시작된 근대교육, 화학 수업 전경, 1907년>
<한국 최초 협동조합운동의 시작이었던 농촌지도자 강습회, 1928년>
<김규식박사의 지도로 시작한 덴마크식 체조, 1909년 YMCA 구회관운동장>
<민족의 자긍심과 단결력을 높이기 위해 시작된 운동회에 모인 사람들>
<YMCA운동의 지도자였던 이상재선생의 사회장 추모 행렬, 1927년>
<일제 하 창립된 YMCA>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전통을 이어 1960년대 이후 시민사회의 공론을 형성하기 위해 시작된 시민논단>
<기업인 등 다양한 시민사회의 참여로 농촌경제의 자립을 위해 시작된 양곡은행, 1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