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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컬, YMCA/YMCA

'거룩한 위선'과 '경건한 사기', 그리고 '악어의 눈물'이 지배하는 사회 - 정글의 평화가 이미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지 모른다.

by yunheePathos 2016. 8. 17.

6월 29일부터 8월20일까지 마닐라Y로 인턴 연수를 온 홍콩Y 대학생 미아(Mia Chow)와 함께 한 어제의 저녁식사. 들어온 날 환영의 식사를 대접 한 번하고 내 생일이라고 식사 대접한다는데 차마 얻어 먹을 수 없어 환송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Mia는 다음 주 월요일에 홍콩으로 귀국하게 된다.


저녁 식사 전에 마닐라Y 식사를 맡고 있는 마빅(Marivic)과 함께 셋이 오늘 점심(생일 파티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마닐라Y 스텝들의 점심 식재료를 제공했다. 닭고기와 돼지고기로 만드는 아드보와 스프 그리고 반구스 생선과 바나나 그리고 음료 등) 식재료를 함께 구입한 후 같이한 저녁식사.


젊은 친구들이 즐겁게 지내는 모습들을 보면서 나이 먹어 다니는 것보다 뿌리가 깊은 젊은 친구들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다시하며 한국Y가 젊은 친구들에게 인색하기만 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소위 기회비용을 생각하며 간사직 채용이나 교육 그리고 젊은 리더십들을 육성하는데 주저해서는 Y운동의 새로운 기회와 지평을 열어가는데 새로운 동력을 마련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젊은 친구들은 소모품처럼 지칠 때까지 견디고 견디다, 견디는 친구만 내 식구라는 생각에서 젊은이들에 대한 시간과 비용지불을 소모 비용으로 생각하거나 말과 달리 우선 순위에서 밀리는 것을 종종 목도하는 것이 현실이지 않은가 싶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고 Y를 책임져가고 있는 리더십들의 순수함과 열정에 대해 존경을 갖는 한편으로 이런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아집과 편견 그리고 폐쇄성은 어쩌면 지금의 시대에 더 큰 독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와이가 하나의 하나님의 선한 도구가 아닌 몇몇 간사들과 멤버십들만의 것으로 만들게 되고 이들의 소아병적인 탐심이 구성원들의 창의성과 도전에 대한 열정을 죽인채 점차 조직의 생명력을 그 뿌리채 말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청년 이슈에 대한 체계적인 대응과 아울러 청년 리더십을 형성해가기 위한 과감한 시스템과 자원의 배분이 필요한 때이다. 그들이 움직이고 행동할 수 있는 굳건한 토대로 기능할 수 있는 공간으로 와이가 기여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이것은 보편적인 사회 현실에 기반해야하며 또한 예수운동체로서 자기 텍스트를 정확히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 있는 사람들의 사고와 경험이 더욱 풍부해야 하고 그 폭이 또한 넓고 깊어야 한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결코 하늘을 포효하는 비전을 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와이가 하나님이 세상에 보낸 편지이자 향기로 하나의 선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인생을 망치는 지독한 폭력을 자주 볼 수 있듯이, 와이가 이런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경력과 관성, 관료적 지위에 흔들리지 않도록 객관화의 잣대를 더욱 분명히 세우고 그에 맞게 모든 영역에서 비우는 것이 필요하다. 


비우는 것이 약해지는 것이 아니다. 당장은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그 비움에 과감히 새로움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도 재원도 이념도 방식도 사업도.. 어중간한 것은 소리없는 아픔의 고통만을 늘려가며 무엇이 길이진도 모르는 채 과오만을 쌓아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생명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는 알맹이가 없는 외형과 규모, 역사는 더 이상 자랑이기보다는 새로운 가능성과 도전을 막는 장애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어쩌면 지금 과감한 단절과 혁신 그리고 계승의 비전이 요청되고 있는지 모른다. 지난 100주년 비전선언문에서 지금을 왜 카이로스적 전환이자 소명의 때로 시대를 인식하고자 했는지 깊은 통찰이 필요한 때이다.


컨텍스트로 부터 텍스트를 분명히 세울 수 있는 볼런티어운동체로서 Y운동이 새로운 소명을 부여받을 수 있을지 그것은 그 누구도 모른다. 오직 기도하는 자만이 그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 사진 한장 올리다 자꾸 이런 전런 문맥도 없이 사족이 늘어가는 병은 무슨 병일까?


와이 뿐만 아니라 한국 정부, 정당, 시민사회 그리고 남북과 지구 시민사회의 상호작용과 작과동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재탐구가 절실한 시점이다. '시간이 흐르 듯 다 지날 갈 것이다'라며 인내하기엔 너무나 극악한 세력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그리고 어쩌면 이미 공고화된 지배질서로 내재화된 시점인지도 모른다.  


또한 세상의 힘에 의한 정글의 평화가 이미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지 모른다. 모든 것이 갈리지고 깨지고 아파하는 것들을 당연시하며 힘으로 봉합하는 평화를 우리 스스로가 이미 작게, 크게 행하고 있는지 모른다. '거룩한 위선'과 '경건한 사기', 그리고 '악어의 눈물'이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그리고 주류 교회 목회자들에 의해 횡행하고 있음에도 그리고 이로 인해 몰락한 개인으로 주어진 의무만이 부과된, 더 이상 희망을 말하기 조차 어려워하는 이들의 거친 숨결에도 우리는 쉬이 응답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나의 배고품에 귀를 기울이며 시대의 징조에 눈을 감고, 겉으로 외치는 소리는 높으나 육신과 마음은 이미 정글의 평화에 길들여진 것은 아닌지...?


Y는 자기 질문과 응답 과정을 거쳐 보편성을 획득할 때 선한 도구로서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국 정신사의 말살과 시대와 역사의 왜곡에 한국교회와 와이가 자의든, 타의든 그리고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무슨 일을 했는지 살펴야 한다. 


결국 시민사회운동론에 대한 재탐구 작업이고 에큐메니컬운동에 대한 사상적 지평을 재설정하는 일일 것이다. 이 두 영역이 편의상 구분되어 토론되어질 수 있으나 그러나 결코 이 둘을 다른 영역으로 치부해서는 안되며 하나의 통전적이고 총합적인 관점에서 수렴해 가야한다. 


이것은 텍스트와 컨텍스트를 통합하고자 하는 예수운동체의 운동이기 때문이다. 지금 그것은 정의와 생명의 뿌리에서 움터 나오는 평화의 바다에서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여튼 텍스트와 컨텍스트, 그리고 하나님과 대면하는 힘으로서 주체의 자발성, 그 어느 하나가 장식품이 될 경우 그 운동은 맥빠진 구조와 형식만이 남고 코끼리 다리를 코끼리로 착각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집단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와이의 지금은 어떤가?

그리고 평화의 열매를 만들어갈 수 있는 정의와 생명의 씨앗과 뿌리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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