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차 YMCA 열린대화마당, 성소수자와 인권-한국사회 성 소수자 의제,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 에서 발표된 내용입니다. (관련안내, 자료 보기)
▢ 일 시 : 2017년 10월 24일(화) 오후 3시 20분 – 6시
▢ 장 소 : 한국YMCA전국연맹 5층 회의실
▢ 주 최 : 한국YMCA전국연맹 목적과사업위원회 (위원장 장윤재),
한국YMCA 간사회(AOS) 젠더정의분과 (위원장 이명화)
한국교회와 성 소수자 :성소수자를 대하는 교회의 태도
박진영(로뎀나무그늘교회)
로뎀나무그늘교회는 지난 일년동안 매주 평균 2명 이상의 새로운 사람들이 방문하였고, 그 중 적지 않은 분들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정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로뎀나무그늘교회를 찾아오시는 분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거나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해왔는데 최근 빈번해진 교회 안의 혐오설교나 분위기 때문에 힘들어하는 분들이었습니다. 혐오설교를 하는 목회자에 대한 실망과 교인들의 배타적인 분위기는 교회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떨어뜨리고, 교회를 점점 멀리하게 됩니다. 그래서 길게는 몇 년 짧게는 몇 달간 교회를 떠나 가나안성도(신앙은 있지만 교회출석을 하지 않는 사람)로 지내다가 로뎀을 찾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새로 오신 분들이 주일 예배를 통해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를 찾은 것처럼 기뻐하고 안도하는 모습을 보면 그동안 답답한 분위기 속에서 얼마나 힘겹게 버텨왔는지 그 마음이 전해져옵니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현상이 지속되는 것이 건강한 것일까요. 오히려 개교회 안에서 성소수자를 이해하고 환대한다면 이분들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를 굳이 떠날 이유가 있을까요.
현재 한국교회의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많은 원인 중의 하나가 배타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는 점점 다원화 되어가고 다양한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갈 방법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변해가는데, 교회 안에서는 다양한 목소리나 다양한 사람들이 존중되지 않습니다. 여전히 위계적이고 권위적인 의사소통방식을 고수하거나 약자에 대한 배려보다는 배제하는 목소리가 더 큽니다. 자신들의 목소리에만 도취되어서 다른 목소리에는 무조건 배타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이 합리적이고 상식적이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한번은 비성소수자인 분이 로뎀을 방문하셨는데, 그 이유가 자신의 주변에 단 한사람도 차별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 없는데, 교회에만 가면 그런 말을 듣는 것이 너무 불편하다는 것입니다. 차별하지 않는 교회를 찾다보니 로뎀을 오게되었다고 합니다. 성소수자 당사자 뿐만 아니라, 비성소수자인 분들도 교회의 차별적이고 배타적인 모습에 실망을 너머 점점 견디기 어려워하십니다.
물론 성소수자 의제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시는 목회자나 성도님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소수자를 대하는 교회의 다양한 모습들을 몇가지로 분류해보려고 합니다.
첫째, 성소수자를 향하여 비합리적이고 비상식적인 배타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기독교인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대화나 만남자체를 거부하고, 성소수자에 대한 논의 자체도 마치 불결한 것처럼 인식합니다. 이러한 모습의 바탕에는 강한 혐오와 실체가 없는 두려움이 있는데, 그것은 왜곡된 정보에 세뇌된 경우가 많습니다. 성소수자에 대하여 직접 만나려고 하기 보다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이미지가 실제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올바른 정보가 주어지더라도 오히려 그 정보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분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성소수자를 주제로 한 강연회나 행사들을 방해하고, 지속적으로 왜곡된 정보를 퍼뜨립니다. 이렇게 약자들을 괴롭히고 차별하는 모습을 보면 과연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일까 의문이 들고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둘째, 모순된 인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러한 자기 모순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기독교인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동성애자는 차별하지 않고 사랑하지만 동성애는 죄이기 때문에 금지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매우 신앙적인 고백처럼 들리지만, 믿음과 실천이 통합되지 못하여 발생하는 모순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서 텍스트의 시대적 문화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담긴 진리를 발견하여 실천하려는 신앙이 아니라, 비본질적인 본문이라도 문자 그대로를 따르는 것이 신앙이라는 근본주의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분들조차도 성서의 노예제도에 대한 찬성 또는 수많은 여성차별적 내용에도 불구하고, 성서가 전하고자 하는 진리는 인간에 대한 구원과 해방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러한 본문을 더 이상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성서해석의 일관성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소위 ‘동성애 구절’이라 하는 본문에 대해서도 성서가 추구하는 본질에 맞춘 해석을 추구하게 되지 않을까요.
셋째, 소수자에 대한 시혜적 관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기독교인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성소수자에 대하여 열린마음과 함께 더불어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지만, 여전히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그들을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 또는 사역의 대상으로 인식합니다. 이러한 인식은 단지 성소수자에게 뿐만 아니라 사회의 다양한 소수자를 향한 교회의 태도가 오랫동안 도움을 주는자와 받는자의 입장에서 이루어졌고 그런 권력관계에 익숙해지다보니 존재 자체까지 마치 열등한 것처럼 여기게 된 것입니다. 차별받고 혐오로 인해 괴로워하는 성소수자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고,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나와 동등한 존재로 그들을 인식할 때에야 비로소 함께 분노하고 함께 차별을 멈출 수 있도록 행동할 힘이 생기지 않을까요.
넷째, 적극적으로 만남과 대화를 시도하는 기독교인이 있습니다. 한국사회는 매우 보수적인 사회이기 때문에 성소수자 당사자가 스스로 먼저 커밍아웃하기에는 안전하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다른 것을 인정하고 포용하지 않는 사회에서 소수자들은 자신을 드려내는 것이 무척 어렵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성소수자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하고, 심지어 커밍아웃하지 않은 성소수자 당사자 앞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혐오발언을 쏟아놓는 경우가 적지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평등한 구조를 이해하고 성소수자의 인권을 위해 함께 목소리를 내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성소수자에 대한 존중을 드러내어 자신이 성소수자를 환대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거리낌없이 알립니다. 자신이 성소수자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올바른 정보를 찾아보려 노력하고, 성소수자를 직접 만나보려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사랑이기 때문에 그 사랑을 실천하고자 지속적으로 당사자의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 인식을 넓혀갑니다.
위의 네가지 분류는 성소수자를 대하는 교회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도 아니고, 절대적인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또한 단계별로 넘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한국 교회 안에 이러한 다양한 모습들이 혼재되어 있고, 그 혼란 속에서 목회자와 성도들이 명확한 지침이나 가이드 없이 갈등하고 망설이고 있는 것이 현재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러한 망설임 속에서 성소수자들은 계속해서 상처를 받고 괴로워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성소수자에 대한 왜곡되고 악의적인 정보들이 계속해서 확대 재생산되고 퍼져 나가고 있는 가운데, 지난 2017년 한국 기독교 주요 교단총회에서는 성소수자에 대한 배제와 차별을 공식화하겠다는 안건들이 통과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과연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인지 의문입니다. 우리의 가족이며 이웃인 성소수자에 대하여 진심으로 알아보려고 하기전에 배제하는 것은 그분들에게 너무 큰 상처이며 폭력입니다. 더욱이 오랫동안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고 비합리적으로 소통해온 공동체일수록 약자의 입장에서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다행히 지난 총회의 성급한 결정방식에 문제제기를 하는 목소리가 많이 나오고 있고, 성소수자에 대해 충분한 연구와 논의가 교회 안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비판들은 매우 고무적인 일입니다.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 했지만, 이 세계에 꼭 필요하고 유익한 모습으로 변하고 있는지 아니면 오히려 뒤로 후퇴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구원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성소수자 의제를 다루어 나갈 때에도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생명을 죽게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게 하는 일이며 참된 자유와 해방을 줄 수 있는지를 성찰해야합니다. 어떤 이들은 성소수자를 비정상이라고 여겨서 억지로 전화치료를 시도하고 있지만, 결코 그러한 억압적인 방식으로는 생명을 살릴 수 없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치료한다는 것은 그 대상이 아픈사람일 때에나 가능합니다. 그러나 성소수자는 존재 자체가 잘못되거나 비정상이 아니라, 혐오와 차별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정작 치료가 필요한 것은 혐오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아닐까요.
한국교회는 전반적으로 소수자에 대한 차별에 대해 더욱 민감해져야 하고, 약자에 대한 감수성을 끌어올려야합니다. 다른이를 섣불리 판단하고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하기 보다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정신을 따라서 지극히 작은 자를 존중하고 그 입장에서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는 매우 급진적인 사람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공동체 안에 가장 힘이 없는 자들, 발언권이 없는 자들, 권력을 가지지 못한 자들, 무시당하는 자들을 단순히 시혜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 보기를 예수는 가르치고 보여준 분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자라면 결코 오만한 자리에 군림하여 마치 자신이 하나님이라도 된것처럼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는 그러한 사람들이었던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그들과 부딪혔습니다. 예수가 옹호하고 함께 했던 사람들이 누구이고, 예수가 비판하고 싸웠던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한국 교회가 성소수자에 대하여 섣불리 낙인찍는 일을 멈출 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획일화된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는 모든 생명이 충만하게 살 수 없습니다. 사회의 구성원이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있는 만큼 가치와 관점도 다양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는 불평등한 사회가 아니라 모두가 더불어 함께 살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면,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는 당연하고, 활발한 논의를 통해 소수자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연 한국 교회는 어떠한 모습으로 사회에 덕을 끼치기 원하는지 깊이 성찰해야하지 않을까요.
과학과 성소수자 : 성소수자를 둘러싼 편견과 국제적 의학/과학 연구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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