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16일부터 20일까지 광주에서 개최된 제7차 한중일YMCA 평화포럼 개회예배 설교를 서광선박사님(전 세계YMCA연맹 회장)께서 수고해주셨습니다. 굴곡진 한국 현대사와 함께한 삶의 족적을 감동적으로 나누시며 Peace Maker로서 한중일YMCA의 역할에 대해 조언을 주셨습니다. 참가자들이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에 대한 진한 여운을 갖고 포럼을 시작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영어 설교문(클릭)을 한글로 번역해 실었고, 영문 /한글 파일을 첨부했습니다.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이사야 2: 4)
서광선 (전 세계YMCA연맹 회장)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2:4]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이사야 11:6]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예레미야 6:14]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9]
인사말 :
피스메이커인 YMCA 동역자 여러분께 하나님의 평화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불리는 한국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하지만 더 이상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 유감스럽습니다. 한국은 이제 미움, 분노, 공포, 핵전쟁, 완전한 전멸, 테러, 복수라는 아귀다툼으로 악몽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촛불혁명
저는 이번 회의가 한국에서 열리게 된 것, 특별히 혁명의 도시 광주에서 열리게 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한자어로 광(光)은 빛을 주(州)는 땅을 의미합니다. 즉 광주란 빛의 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7년 전인 1980년에, 광주 시민들이 시대의 암흑을 몰아내기 위해 초에 불을 붙이고 YMCA 건물 앞에 있는 시청광장으로 나왔습니다. 대학생, 상점 주인들, 택시 버스 기사들, 구두닦이 소년들, 종교지도자들, 평범한 남녀 시민들이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와 생명을 울부짖으며 시청광장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군사분계선을 지키다가 내려온 중무장한 군인들을 상대로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왔고, 군인들은 총과 탱크와 헬기를 이용하여 민주주의를 향한 울부짖음을 억압하였습니다. 5월 18일 광주시민들이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대항하여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봉기를 일으켰고, 평화를 사랑하는 수 천명의 시민들이 군인들의 조준사격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YMCA 피스메이커로서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 여러 지역에서 참석한 여러분들을 환영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제는 우리가 매우 자유롭게 평화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모여서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는 2016년 11월부터 2017년 3월까지 있었던 한국 국민들의 촛불혁명이 준 선물입니다. 추운 겨울부터 3월의 봄까지 대한민국의 많은 도시의 광장에서는 수백만의 시민들이 어둠의 폭압을 몰아내기 위해 촛불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2의 광주 민주화 운동이었습니다. 평화적인 시민의 민주화 운동은 새로운 삶과 민주주의, 정의, 평화 그리고 한반도 통일의 새로운 비전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70년의 세월 동안 군사정권 아래서는 평화와 화해, 그리고 분단된 한국의 통일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북한에 살고 있는 형제자매를 레드 콤플렉스의 피해망상으로 인해 적으로서, 사회주의 악마로서 증오할 것을 교육 받았고 강요받았습니다. 무력은 평화에 반하는 것이며, 독재는 인간의 자유와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이며, 핵무장은 모든 생명에 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는 민주주의와 인간의 자유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힘들게 배웠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적 자유가 없이 평화를 이야기할 수 없으며, 평화와 정의가 없는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이유들 때문에 여기에 모인 우리 모두를 환영하는 바입니다. 이 역사의 위급한 순간에 여기 한국, 특별히 광주시에서 이러한 국제회의를 할 수 있다는 것이 확실히 기쁘고 자랑스럽습니다.
개인사: 사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
사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이라는 것을 페미니스트 신학자들로부터 배웠습니다. 87년의 삶, 내 삶의 이야기는 중국과 일본, 한국이(알파벳 철자순) 정치적으로 복잡하게 얽힌 역사와 같이합니다. 내 삶의 이야기는 여기 이 회의에 참석한 국가들의 대표적인 “국제관계의 근대 역사”와 매우 가깝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저는 1931년 북한과 중국을 나누는 경계인 압록강 근처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습니다. 1931년은 일본제국이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세운해입니다. 저는 반은 일본인으로 태어난 셈이며, 제 진짜 한국이름 대신에 새로 지어진 일본이름을 사용하며 일본어로 배우는 한국 초등학교에 보내졌습니다. 제 아버지는 미국인이 세운 미션스쿨에서 교육받았고, 평양 신학교에서 항일 투쟁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일본 지배에 대항하여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가문의 전통을 따르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조선에 침략하는 일본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항일 무장군대를 조직한 군 사령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체포 되었고 일본군에 의해서 총살형을 당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수감 중이던 할아버지의 죽음 소식을 접한 할머니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결심합니다. 할머니는 본인이 독약을 먹기 전에 먼저 나의 아버지의 형과 누나들에게 독약을 먹이셨다고 합니다. 그때 제 아버지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식이었습니다.
나는 이처럼 비극적이고 영웅적인 가족사를 지닌 가정에서 성장하였으며, 일본어와 일본 제국의 빛나는 역사를 배우는 매우 애국적인 일본 학생으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한국 학생들은 매일 아침 조회시간에 “우리는 일본 제국의 사랑 받는 자녀입니다……”라는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해야만 했습니다. 게다가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 씩은 신사참배를 위하여 신사가 있는 근처 산에 올라야만 했고 신사 앞마당을 청소하였습니다.
일본 정부는 모든 한국인 목사들에게도 똑같이 신사참배를 강요하였습니다. 제 아버지를 포함한 많은 한국인 목사들이 그것을 거부 하였습니다. 그것은 일본 압제에 대하여 종교적인 저항뿐 아니라 정치적인 저항이기도 했습니다. 일본 경찰의 악랄한 폭압과 압박을 피해서 나의 아버지는 한국 교회에서 사임하셨고 가족 모두가 짐을 싸서 만주국으로 자진해서 망명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여러 한국인 난민 교회에서 설교 하셨지만, 만주국에서 우리의 삶은 비참하게 가난하고 배고픈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항일 투사이자 목사이신 아버지는 만주국 남서지역의 선양과 단둥 사이에 위치한 중국인 광산촌의 일본인 중학교에 저를 입학시키는 것을 고집하셨습니다.
한국인 학생으로서의 만주국에서의 생활은 민족 정체성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그저 비참하였습니다. 만주국에서 일본인들은 1등 시민으로 대접받았으며, 한국인들은 2등, 중국인들은 가장 낮은 3등 시민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쌀이 배급 되었는데 일본인은 10, 한국인은 7, 중국인은 단지 5만큼만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한국 사람들이 중국인들에게 얼마만큼 미움 받았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인은 단지 7만큼 받는 한국인을 무시하였고 중국인보다 좀 더 많이 받기에 중국인에게는 미움을 받은 것입니다. 한국인은 일본인과 중국인 사이에 끼여 고통 받았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한국인 경찰들은 일본 경찰의 앞잡이로 한국인과 중국인 모두에게 가장 잔인한 존재였습니다. 이러한 민족투쟁의 한가운데서 저는 항일 투쟁 목사이신 아버지에 의해 일본인 중학교에 보내졌습니다. 저는 열심히 공부했고 일본인 학생들보다 잘하는 한국 학생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저는 살아남기 위하여 일본인 학생들보다 더 일본인처럼 행동하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가정에서는 한국 문학과 역사책, 한국어 성경을 읽으면서 일제에 저항하는 자유 투사로서 키워졌습니다.
1945년 8월에 우리 일본 중학교 학생들은 동네 근처 언덕에 깊은 구멍을 만들기 위해 땅을 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땅을 파기 시작했을 때, 소련 탱크가 일본과 싸우려고 북한으로 내려가기 위해 만주국 남쪽지역을 침략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소련군 침략에 대항하여 만주국을 방어하고자 중학교 학생들이 땅 구멍을 파는데 동원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땅 구멍으로 침략하는 소련 탱크를 빠뜨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인 급우들은 소련군으로부터 만주국을 보호하기 위한 구멍을 파는데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미국 폭탄에 의해서 도쿄가 폐허가 되었다는 신뢰할 만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수십만의 노동자와 시민을 죽이고 산업시설을 폐허로 만든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마침내 1945년 8월 15일에 우리가 탱크에 대비한 구멍을 파기 시작했을 때, 선생은 우리를 그의 주위에 빙 둘러서 모이도록 지시하였고 그의 단파 라디오의 스위치를 켰습니다. 정오에 아나운서의 소개 후에 일본 천황이 말했습니다. 전쟁은 일본의 패망과 함께 끝났다고. 우리 선생이 스위치를 끄자 나의 학급 동료들은 큰 소리로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울면서 말했습니다: “사요나라. 우리 모두 짐을 싸서 일본 고향으로 돌아가자!!! 사요나라……”
나는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는 마침내 일본으로부터 자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지켰습니다. 나는 선생이 “사요나라”라고 하는 것을 듣자마자 큰소리로 소리쳐 대답했습니다. “사요나라” 그리고 언덕을 뛰어 내려갔습니다. 나의 목사 아버지는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끌어안고서 눈물이 마음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눈물이란 의미도 모른 체 울었습니다.
우리 가족 모두는 북한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압록강을 건너는 난민 기차에 올랐을 때 한반도가 남한과 북한에 들어온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단될 것이라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북한에 있는 어머니의 품 같은 외할아버지의 집에 도착하였을 때 소련군이 북한으로 행진해 내려오고 있다는 뉴스 또한 들었습니다. 소련이 공산정부 수립을 돕자마자 기독교인들은 사상적인 이유로 공격받고 탄압을 받았습니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반공산주의 목사였던 아버지가 북한 보안 요원들에 의하여 납치되었고, 미군과 한국군이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행군하였을 때 우리는 강둑에 눕혀져있는 아버지의 주검을 발견하였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다른 네 명의 목사와 함께 한 줄로 묶여서 총살을 당하였습니다. 우리는 곧 다시 돌아와서 묘소를 잘 돌봐드리겠다는 약속과 함께 아버지를 평양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양지바른 언덕에 묻어 드렸습니다. 그것이 1950년 10월이었습니다. 그리고 중국 의용군이 참전하여 미군과 한국군을 현재의 DMZ 남쪽까지 압박해 내려왔습니다. 1953년에 휴전협정이 중국과 미국 북한에 의하여 체결되었습니다. 남한의 이승만은 사인을 거부하였습니다. 나는 남한으로 내려왔고 남한 해군에 자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평화, 평화,” 평화가 없을 때
선지자 예레미야는 분노하여 땅에는 평화가 없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전쟁과 파괴의 위험에 관하여 무관심하였습니다. 여러분이 한국 공항으로 들어와 광주로 내려오면서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한국에서 전쟁에 일어날 것을 걱정하는가, 왜 사람들이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전쟁, 전쟁, 전쟁을 외치고 있는가? 이유는 (1) 우리의 북한 형제들은 1953년 휴전협정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남한을 포함한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북한 정권을 보호하기 위해 핵폭탄을 소유하는데 미쳐있다. (2)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의 태평양 연안과 그 밖의 지역을 향한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를 막고자 북한 지도자를 공개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3) 일본의 아베는 미국에 군사동맹으로 붙어서 재무장과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 평화헌법을 개정하고자 밀어 붙이고 있다. (4) 중국은 남한 정부가 북한의 미사일 방어뿐만 아니라 중국의 군사활동에도 영향을 주는, 미국의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인 사드가 남한에 배치된 것에 대하여 화가 난 상태이다.
나는 트럼프가 일본에 도착해서 아베와 골프를 치고 있다는 TV 뉴스를 시청하면서 이 설교문을 작성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전쟁도발자이자 과거의 적이었던 두 나라 정상이 중국과 러시아의 대륙의 힘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대하여 계획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식견이 있는 사람들은 중국, 북한과 남한, 그리고 러시아를 포함하는 인도 태평양 동맹을 만들기 위한 아베의 소위 다이아몬드 전략에 대하여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한은 미국과의 역사적인 동맹을 강조하면서 한편으로 한국과 일본의 군사동맹에는 거부 의사를 표시하며, 참여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지난 2주 동안 중국이 남한에 중국인 관광객을 다시 보내줄 가능성을 보였기 때문만 아니라 남한은 중국과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한 미국과 일본의 군사동맹 참여 강요로부터 독립성과 자기 결정권을 잃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남한 정부는 이미 3불 정책이라고 이름 지어진 ‘(1) 한반도에서 사드 추가배치 불가 (2) 미국 미사일방어체계(MD)에 가입하지 않고 (3) 한미일 3국 군사동맹은 없다’ 정책을 발표하였다.
최근에 당선된 우리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을 향한 평화적인 포용정책인 “달빛 정책”을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화를 향해 가기로 결심한 듯 보이고 한반도에서 전쟁은 없어야만 한다고 공개적으로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일부 한국인 역사학자들은 역사는 그 자체로 반복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지금 1894년 한반도에서 청일전쟁이 발발했던 123년전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일본군의 승리와 함께 일본은 한국에 들어와 1945년까지 우리 땅과 사람들을 지배하였습니다.
한반도의 지난 1000년 동안의 정치상황과 전쟁의 역사를 살펴볼 때, 두 번의 중국인 침략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1231년에서 1232년 사이의 몽골 침략이고 다른 하나는 1636년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비록 한국이 조공국(朝貢國)처럼 여겨졌을 지라도 중국과 한국이 약 4세기 동안 평화로운 관계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본과의 관계에서 일본 사무라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부터 한국에 침략군을 보내서 약 6년간 우리땅을 황폐화 시켰습니다. 그리고 1894년까지 약 2세기동안은 외부로부터 무장세력의 침략에 관한 공식적인 기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난 2000년의 역사에서 한국이 다른 이웃 국가를 침략한 적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이것은 만약 한반도 주위를 둘러싼 일본이나 중국 러시아 그리고 미국 같은 힘이 우리를 떠나고 한국인만 홀로 남는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 평화를 지켜나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사실을 특별히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한반도가 한국 사람들의 의지에 반하여 분단되었고, 1950년에서 1953년까지의 한국전쟁이 동과 서의 냉전의 결과물이었다는 것을 고통스럽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국전쟁은 불행하게도 소련과 중국에 맞서는 미국의 “대리전”이었던 것입니다.
이사야의 평화에 대한 예언자적 비전
전쟁의 공포를 잘 알고 있는 옛날 전쟁에 관한 베테랑으로서, 나는 지구의 평화를 위한 이사야의 예언자적 비전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2017년 크리스마스가 불과 한 주 앞으로 다가오면서 우리는 하늘에서 천사의 노랫소리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한국YMCA는 우리의 100주년 기념식에서 개정된 목적문을 채택하였습니다: “한국기독교청년회는 젊은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삶을 따라 함께 배우고 훈련하며, 역사적 책임의식과 생명에 대한 감성을 일구어, 사랑과 정의와 평화의 실현을 위하여 일하며, 민중의 복지 향상과 민족의 통일 그리고 새 문화 창조에 이바지함으로써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나의 신학자 친구인 Jurgen Moltmann 박사는 최근에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개혁교회 총회에서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습니다: “ 우리는 늙었고 지쳤고 춥다. 우리는 새롭게 변해야 한다. 우리에게 새로운 심장을 주어야만 한다. 우리는 혼란스러우며 불확실하다 우리를 변화시키며 우리 안에 새로운 영으로 우리를 깨워야 한다. (그의 연설은 그의 편지와 함께 나에게 개인적으로 전해졌습니다.) 저도 Moltmann과 같습니다: 저는 나이 들었고, 지쳤으며, 무력합니다. 저는 한반도의 분단된 민족 현실에서 전세계에 있는 저의 에큐메니칼 친구들과 함께 평화와 화해의 길로 나가고자 노력해왔습니다. 제가 저의 아들들과 딸들 그리고 손주들에게 새로운 비전과 희망을 줄 수 없다는 것에 매우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러한 것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일본의 YMCA가 한국YMCA의 피스메이커들과 함께 동북아 지역의 연대 속에서 한반도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저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저는 이번 회의에서 여러분들이 (1) 핵 없는 세상, (2) 북한과 남한, 미국, 중국 사이의 평화조약 수립, (3) 한국과 일본으로부터 모든 외국 군대와 군사시설의 철수, (4) 동북아 지역의 무기 감축, (5) 동북아 지역 국가간의 자유롭고 개방된 이동과 소통을 위해 일하는 피스메이커가 되기 위해 헌신할 것을 기도합니다
St. Francis of Assisi의 평화 기도를 저와 함께 하시겠습니까?
주여, 나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주옵소서
증오가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주여, 나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주옵소서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옵소서.
오 신성한 주님이시어,
제가 위로하는 것 만큼 위로를 구하지 않게 허하소서.
이해하는 것 만큼 이해받기를,
사랑하는 것 만큼 사랑받기를 구하지 않게 허하소서.
주여, 나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주옵소서
절망이 있는 곳에 사랑을,
증오가 있는 곳에 사랑을 심게 하옵소서
우리는 베품 속에서 베품을 받고,
용서 속에서 용서받기 때문입니다.
* 춘천YMCA 이원영간사님께서 깔끔하게 번역을 해주셔서 포럼 준비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ㅣ예배 인도를 맡아주신 송인동 연맹 실행이사님
ㅣ 예배 반주를 맡아주신 광주Y 회원과 연맹 박종희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