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윤치호, 이상재, 김정식, 김규식, 최병헌 등 지도자들이 청년회에 적극 참여하면서 교육․계몽․선교의 지도노선은 함축성이 풍요해지고 외국인 지도자와 한인지도자 사이에는 자칫 하느님 나라 운동을 둘러싼 긴장관계가 조성되는 활기를 보였다. 더욱이 1907년의 소용돌이 속에서 YMCA 중진들(알렌, 전덕기, 헐버트)의 정치적 관여로 인하여, 갓 출범한 ‘황성호’는 위기를 맞이하는 듯이 보이기도 하였다.
‘사중목적사업-정신적, 지적, 사교적, 신체적 spiritual, mental, social, physical’의 출현은 한국사회의 충격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족하였다. 황성기독교청년회는 당시 ‘사중목적사업'을 효과적으로 실시할 수 있다고 여겨진 구식 부서화 제도를 채택하여 종교부, 교육부, 체육부, 사교부를 두고 각각 위원회와 책임간사를 두어 사업을 운영하였다. 또 프로그램 평의회에 해당하는 것으로 ’의사부‘를 두어 사중목적사업의 사업적 통일을 기하였다. 이러한 모든 점에서 볼 때 황성기독교청년회는 당시의 세계YMCA의 수준급 조직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수준급 조직구조 속에서 우수한 인물들이 지도력을 행사한 것이다.
황성기독교청년회는 ‘사중목적사업’을 도구로 젊은이들의 전인교육에 진력하였을 뿐 아니라 이를 통하여 하느님나라 운동으로 활력화하는 일에 힘썼다. 특히 김정식과 이상재는 체육사업을 구국운동의 도장화하는 데 있어 지도력을 발휘하였으며 ‘기독교청년회학관’ 관장 김규식은 학관학생들로 YMCA를 조직하여 학생운동의 대열에 가담케 하였다.
더욱이 종교부 위원장 최병헌과 종교부 ‘총무’ 이상재가 주재하는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종교사업’은 그 수시적, 정기적 강화, 강연, 성서연구회 등을 통하여 ‘조선기독교’ 정립의 바탕을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윤치호(부회장)는 매월 1회 정기적으로 가진 강화를 통하여 ‘참여적 기독교’의 필수성을 강조하였고 최병헌은 1906년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가진 ‘종교와 정치의 관계’라는 제하의 강연을 통하여 ‘모든 문화, 사회, 정치 문제들을 종교적인 입장에서 풀이하였다. 특히 최병헌의 ’정치적 중립불가론‘은 당시 일본통감부가 ’교회와 정치의 분리‘를 주장하고 선교사들이 ’영과 세상과의 분리‘를 주장하여 각각 한국교회 ’비민족화‘시키려던 정책에 대한 강한 NO를 표명한 것이었다.
실로 조선기독교청년회의 윤치호의 ‘사회참여의 신학’과 최병헌의 ‘문화의 신학’은 조선기독교 정립의 기초를 구축하는 최초의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한국YMCA 운동사 1985 p.99
<세계YMCA 파리선언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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