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독립선언운동의 국내전입 경로
3.1운동이 동경의 한국YMCA에서 진행된 독립선언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일제 정보통의 분석이었다. 그런데 그 선언서를 국내에 반입하고 국내 독립운동의 기운 조성, 아니면 그 기운과의 합류를 가능하게 한 연락을 수행한 이들이 대개 송계백(宋繼白), 최근우(崔謹遇), 서춘(徐椿, 1894-1943) 및 김마리아(1891-1944)였는데 이들이 다 기독교인들이었고, 그리고 송계백은 청년학관을 졸업한 인사였다. 그가 독립운동의 국내모사 주동인 최인(崔麟), 송진우(宋鎭禹), 최남선(崔南善), 현상윤(玄相允)과 만나 동경 상황을 제보함으로써 일대 거사의 시운을 합류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최남선이 나서서 기독교의 이승훈(李昇薰, 1864-1930)과 교섭함으로써 민족대동단결의 독립운동이 거사될 수 있었다.
동경 유학생의 2.8 독립선언
제 1차 세계대전은 1914년에 시작되어 1918년 11월에 끝났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하나의 현저한 현상은 미국의 국제적 발언권이 강해진 사실이다. 처음에 중립을 지키고 있던 미국이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17년 4월에 영․불 두 나라와 손잡고 참전을 하여 그들에게 무기와 물자를 수송해 줌으로써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게 했다. 그 결과 미국대통령 윌슨은 1918년 1월에 전후처리원칙으로서 민족자결주의가 들어있는 14개 조항을 제창하였으며, 독일은 그해 11월에 내란이 일어나 연합국에 항복함으로써 파리강화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민족자결이란 어떤 민족이든 그 민족의 의사에 따라 독립을 원하는 민족은 독립을 주어야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강대국의 속국이었던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 10개 민족이 각각 독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소식이 신문에 보도되자 우리 민족의 애국지사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1918년 12월 1일 도쿄에서 발행되는 ‘Japan Advertizer'라는 영자신문이 “미주에 있는 조선인 중 이승만, 민찬호, 정한경 등 세 사람이 조선민족대표로 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다”라는 내용의 기사가 보도되었고, 그 달 15일 일본의 아사히 신문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조선인들이 독립운동자금으로 30만원을 모금하였다”라는 기사를 보도하였다. 이런 보도로 유학생들의 마음은 흥분되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일어난 것이 동경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운동이었다. 그해 12월 하순 재일한국YMCA에서 학우회 주최로 웅변대회를 열게 되었다. 많은 학생들이 운집했다. 연사로 나온 학생들은 민족자결의 원칙아래 우리 민족도 반드시 자주독립을 획득하여야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 유학생들이 앞장서서 결사적으로 싸워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웅변대회가 끝난 후 최팔용, 백관수, 김도연, 송계백, 이광수 등이 대표위원으로 뽑혀 독립운동 방안을 연구하게 되었다. 이 대표위원들은 한달 이상 경찰의 눈을 피해 가며 이곳저곳에서 의논을 거듭했다. 그들이 만들어낸 계획 중의 하나가 2월 8일을 기하여 한국YMCA에서 학우회총회를 한다는 구실로 집회를 가지고 ’조선청년독립단‘의 발기대회를 열고 독립선언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운동은 유학생들만이 할 것이 아니라 전 민족이 다같이 하게끔 국내와 상해에 연락원을 파견키로 결정했다.
예정된 2월 8일이 되었다. 수많은 정사복의 경관들이 삼엄하게 경계망을 펴고 있는 가운데 오후 2시 총회가 열렸다. 회장 백남규가 개회를 선언하자 최팔용이 재빨리 긴급동의를 하면서 단상에 올라가 조선청년독립단의 발족을 선언하여 만장의 박수를 받고 이어 백관수가 준비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김도연이 결의문을 낭독했다.
이어 서춘이 선동 연설을 하기 위하여 단상에 올라가려 할 때 그때서야 사태를 알아차린 일본경관들이 해산명령을 내려 흥분된 학생들과 경찰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 때 많은 학생들이 연행구속되었다.
2․8선언이 일어나기 전 1918년 12월 초순에 유학생들은 송계백을 밀사로 국내에 파견하여 세계정세와 일본유학생들의 동향을 보고하고 독립운동을 일시에 벌일 것을 주장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때는 YMCA를 중심으로 선교사들과 외국인을 통하여 윌슨대통령의 제안을 듣고 웅성거리고 있는 때였다. 특히 YMCA의 간사 박희도는 1919년 1월 23일경 YMCA 회원인 연희전문학생 김원벽과 의논하고 각 학교 대표들을 시내 대관원에 초치하여 국내의 청년학생들을 중심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자는 움직임이 무르익고 있었다. 동경에서 일어난 2․8선언이 재일YMCA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은 위에서 이야기한바와 같다.
(2003년 서울YMCA 창립 100주년위원회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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