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정신을 강조한
조병옥 박사
-연희전문교수, 항일민족운동의 전위대
조병옥 박사는 동학난이 일어났던 1894년 3월 21일 충남 천안군 용두리(龍頭里) 목천(木川)에서 태어났다. 목천이란 곳은 최근 독립기념관의 건립터로 선정된 곳이며 이동녕(李東寧), 이범석(李範奭), 류관순(柳寬順) 등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태어난 고장이며, 류관순 영화에 나오는 “조(趙) 속장”은 바로 조 박사의 아버님이 된다. 그만큼 이 고장 사람은 예부터 독립정신과 정의감의 강한 사람들이었다.
1908년 15세 때 5년제 공주(公州) 영명(永明)소학교 4학년에 편입, 17세 때 다시 4년제 평양 숭실중학 3학년에 편입, 1912년 이 학교를 졸업하고, 현 연세대학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년 간 고등교육을 받고 잠시 그 학교의 강사가 되기도 했다.
다시 그는 1914년 미국유학을 떠났다. 영어실력 때문에 고등학교 과정을 밟은 뒤, 콜럼비아 대학에 입학하여 경제원리, 재정학을 전공, 1923년에 동 대학에서 M. A 학위, 1925년에 Ph. D학위를 받고 11년 만에 귀국했는데 그동안에 그는 서재필 박사, 이승만 박사, 박용만 선생 등의 지도 하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더욱이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당시 미국 사상계를 휩쓸고 있던 사회복음(Social Gospel)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귀국하자 그는 연희전문(연세대 전신)의 교수로 있으면서 항일 민족운동의 전위대가 되었다. 그는 「민족은 영원불멸의 존재요, 국가는 왕래하는 존재이다」라는 정치이념을 가지고 항일 민족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그는 당시 불일 듯 일어났던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에 대하여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내세워 그들과 대결했다. 드디어 그는 신간회 간부로서 공산주의자들이 신간회를 깨려할 때 이를 타도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YMCA와 깊은 관계를 가지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는 한때 감리교 정동교회의 전도사 일도 보았고, 장감 두 교파의 젊은이들과 연희전문 학생들 약 60명으로 “기독교 신우회”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는 동시에, YMCA 이사로서 강연회, 일화강회의 강사로 활약했다. 그는 YMCA의 지도층의 미온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고 YMCA 개혁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YMCA강연석상에서 「성경말씀에는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지만, 우리 조선 사람들은, 특히 나 자신은 기독교 신자의 입장에서 일본을 위하여 잘 되라고 차마 기도를 올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며, 또 일본이 잘 되라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으며, 「YMCA가 종래의 방침대로 젊은 기독교 신자들의 친목이나 교양단체로 그칠 것이 아니라, YMCA의 혁신운동을 전개하여 운동경기장을 건설하고 목욕탕을 설비하는 한편 민족운동의 일역으로서 사회개혁운동에도 가담하는 것이 좋지 않으냐」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특히 그는 1927년 3월호 《청년(靑年)》지에서 <종교가도 혁명가가 될 수 있을까>라는 주제로 「기독교는 무력보다 여론으로서 사회를 개조할 것이다… 불의 편의 이해성과 협동성이 전무하다고 판단이 갈 때에는 무력의 수단으로 당자의 문제를 해결하여도 기독교의 교훈 표준에 죄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비인도와 비정의에 당면할 때에는 도덕상으로 혁명심을 가져야한다. 정의를 성립하는 수단에 들어가서 다른 방법이 없을 때에는 무력으로써 변혁함도 기독교 진리에 위배되지 아니한다」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3월호 청년지 <십자가의 무사>라는 글에서 「예수는 과연 무사이다. 그저 무사가 아니라 십자가의 무사이다. 이처럼 자기가 무사인 까닭에 그를 따르라 하는 사람도 무사가 되어야 한다. 그의 말씀이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각각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함은 그것을 두고한 말씀이다…예수는 그처럼 불의한 세상을 개량하라는 무사이다…예수는 방향없이 함부로 흘러다니는 홍수를 그냥 둔 것이 아니라 그 유세를 잘 인도하려고 애써 행한 것이 그의 사명이었다.… 우리가 다같이 예수를 따라야 할진대 예수의 발자취 즉 무사다운 그 희생주의를 관철하여야 한다.… 우리 사회의 무식, 질병, 빈곤, 전쟁, 이러한 불행의 중한 바를 퇴거키에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십자가의 무사요, 사랑하는 남녀 우리의 청년들은 이 평화를 세우기 위하여 무사가 되어야 한다. 등에 십자가를 지고 불의를 퇴벌하러 나서야 한다.… 예수께서 지금 우리의 고막이 찢어지도록 “너희 청년들은 불의를 깨치고 참된 새 세계를 만들기 위하여 십자가를 등에 지고 떨치고 나서는 무사가 되어라! 무사가 되어라!”고 외쳤던 것이다.」
이처럼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또한 열렬한 Y맨으로서 활약한 것을 회상하면서 그는 자기의 회고담에서 「나는 39세가 될 때까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며, 또 이곳저곳 교회당을 다니면서 설교를 한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했다.
아깝게도 그는 1960년 1월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출마했으나, 병 치료차 미국에 갔다가 2월 15일에 별세했다.
등걸
-1983.1.1 청년
'에큐메니컬, YMCA > YMCA' 카테고리의 다른 글
농촌 운동체로서의 YMCA (0) | 2018.12.05 |
---|---|
YMCA 인물 53. 2.8 독립선언문 서명자 송계백 선생 (0) | 2018.12.05 |
YMCA 인물 51. 영원한 한국인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박사 (0) | 2018.12.04 |
YMCA 인물 50. 한국교회 토착화를 주장한 변성옥 박사 -목사, 정치가, 신학교 교수, YMCA 총무 (0) | 2018.12.04 |
YMCA 인물 49. 일본인에게도 존경받은 이상재 선생 2 (0) | 2018.1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