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독립선언문 서명자
송계백 선생
-거족적인 독립운동 위해 국내외 밀사로 활약
1919년에 일어난 2.8독립선언의 주동인물인 송계백 선생은 1895년에 평안남도 영유(永柔)에서 태어났다. 송 선생이 YMCA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중학교를 졸업한 후 영어실력을 더 기르기 위해 3년제 중학영어와 주학부인 Y 학관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1914년에 보성중학교를 제 5회로 졸업하고 그는 3년 후에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민족적인 거사 2.8 독립운동에 가담케 됐다.
또한 1915년 4월에 광주에서 열린 제 5회 학생수련회에 Y학관 학생대표로 다른 두사람과 함께 참석하기도 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가 일본에 건너가서는 재일본 한국YMCA의 당시 총무이던 백남훈(白南薰) 선생을 비롯해서 김도연(金度演), 백관수(白寬洙) 등 간부회원들과 매우 가깝게 지내면서 Y운동에 열성회원으로 참여했다.
그런데, 1918년 8월경부터 동경유학생들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12월 1일 동경에서 발행되는 Japan Advertiser라는 영자신문을 통해 「미주에 있는 조선인 중 이승만, 민찬석, 정한경 등 세 사람이 조선민족 대표로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파리 강화회의에 파송되었다」는 내용과,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거류하는 조선인들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30만원을 모금하였다」는 기사와 함께 자극을 받은 유학생들은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거사 일자를 1919년 2월 8일로 정하고 이 사실을 국내에 전달하여 거족적인 운동으로 확대시키기로 했으며 밀사로서 송계백 선생을 선정했다. 송 선생은 중대한 사명을 띄고서 1919년 1월 초순경에 국내에 숨어 들어와 우선 사제지간이던 전 보성중학교 교장 최 린(崔 麟)을 비롯해서 송진우(宋鎭禹), 현상윤(玄相允) 등 저명인사를 찾아가 도쿄 유학생의 동정을 보고하고, 국내의 모든 국민이 거족적으로 참여해 줄 것을 호소했다. 그는 학생모자를 뜯어 백관수 선생이 작성하고 이광수 선생이 탈고한 2.8 독립선언서를 보이고, 이 독립운동은 국내와 국외가 한날 한시에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때 최남선(崔南善) 선생은 국내의 독립선언서를 쓰겠다고 자청했고 Y 회우부 박희도(朴熙道) 선생은 학생조직을 서두르게 되었으며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 선생은 기독교 측 동지규합을 하기 이르렀다.
송계백 선생은 밀사의 사명을 완수하고 그 달 그믐 경 서울을 떠나 현해탄을 건너 다시 도쿄 동지들과 합류했다. 갈 때는 활자를 가지고 갔으나 물샐틈없는 일본 경찰의 감시와 스파이들의 밀고가 마음에 걸려 모처럼 갖고간 활자는 사용하지도 못하고, 선언서는 등사판에 프린트했다.
드디어 2월 8일 오후 2시엔 정․사복 경관이 삼엄하게 감시하는 가운데 재일본 한국YMCA 회관에서 학우회 총회를 한다는 명목으로 학생들이 함께 자리했다.
백남규(白南奎)가 개회를 선언하자 최팔용(崔八鏞)은 단상에 뛰어 올라가 『조선청년독립단』의 발족을 선언하고, 백관수가 선언문을, 김도연이 결의문을 낭독했다.
그러자 곧 경관들은 흥분된 학생들과 난투극을 벌였다. 이로 인해 많은 학생들은 팔이 꺾이고 잡힌 채 끌려갔으며,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9명 가운데 최팔용, 윤창석(尹昌錫), 이종근(李琮根), 김철수(金喆壽), 백관수, 김상덕(金尙德), 서춘(徐椿) 그리고 송계백 등 7명은 제일 먼저 잡혀가게 됐다.(이광수와 최근우는 연락차 상해에 가 있었으므로 이를 모면함)
독립선언서 서명자들은 니시간다(西神田) 경찰서에 잡혀갔다가 이찌가야(市各) 감옥으로 넘겨졌다.
2월 20일부터 시작된 재판은 5월에 검사의 논고로 금고 2년형의 구형을 받게 되었고 그중 백남훈은 유명한 변호사의 변호로 6월 10일 경에 9개월로 감형받게 되었다.
1920년 3월 9일에 그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그러나 송 선생은 감옥에서 페결핵이 재발되어 병보석을 받아 고향에서 달려온 형 송계은(宋繼殷)씨의 부축으로 귀국했다.
가족들은 그를 지성으로 간호했으나 결국 1920년 봄에 고향에서 작고했다.
등걸
-1983.2.1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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