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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컬, YMCA/YMCA

농촌 운동체로서의 YMCA

by yunheePathos 2018. 12. 5.

농촌 운동체로서의 YMCA

1925년부터 시작된 농촌운동은 피폐한 농촌을 개발하고 복음을 전파하여 농민의식개혁과 농업발전에 대단한 영향을 미쳤다.

강령 : “우리는 농민의 경제적 향상, 사회적 결단, 정신적 소생을 도모한다.”

사업

- 야학과 주학개최

- 아동, 성인 교육 추진

농민강습소: 전국에 60여개 7,200명 학생 수용 (1926-1934). “정신적 발전소라 칭함

협동조합운동 전개(1929년 서울기준)

- 협동조합 : 11

- 소비조합 : 5

- 판매조합 : 11


* 자료 출처 및 각주 등의 세부 정보는 첨부자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농촌운동체로서의 y.pdf

<YMCA 농촌지도자협의회(1928)>


<자료1> 와이...에이의 농촌운동과 협동조합운동

 1920년대 민족 개량주의 농촌운동이 한창일 때 농촌계몽운동, 농사기술보급운동 특히 협동조합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YMCA 농촌운동의 시작은 당초 미국이나 영국을 통하여 들어온 YMCA운동은 농업이 지배적인 한국과 같은 사회에서는 잘 맞지 않는다는 반성하에 출발했다. 우선 당시 YMCA 총무였던 신흥우 총무가 1923년 겨울을 서울 근교 농촌에서 3개월 간 살면서 농촌실태를 조사한 것으로부터 구체적인 방향이 정해진 것 같다.

이렇게 제1차 농촌조사를 마친 YMCA1924년 신흥우 총무를 미국에 파송하여 당시 YMCA 국제위원회 총무 모트(J.R.Mott), 브로크만(Fletcher S. Brockman), 한국에 있는 Frank M. Brockman의 친형), 페니(J.C.Penny, Penny Store 백화점 경영자) 씨 등과 마나 레이크 플래스드(Lake Placid)에서 5인 회담을 했다.

5인 회담에서 그들은 우선 다음과 같은 합의를 보았다.

(1) 전국에다 10개 지역을 선정하여 북아메리카에서 파송한 전문간사를 배치한다.

(2) 이 전문간사는 1925년부터 시작하여 1년에 2명씩 5년 간에 10명을 파송한다.

(3) 이 전문간사들은 전부 농촌문제 전문가라야 하는 동시에 YMCA정신과 목적에 투철한 사람으로 한다.

(4) 조선기독교청년회 연합회는 10명의 외국인 전문간사와 함께 일할 수 있는 한국인 간사 10명을 가져야 한다.

(5) 각 지역에는 회의도 할 수 있고 교육도 할 수 있는 시설을 구비하며, 농사개량과 농작물증산을 시범할 수 있는 최소한도의 농토를 마련해야 한다는 결정을 하고 농촌사업에 착수하기 시작하였다.


19252월에 YMCA 기구를 개편하여 홍병선으로 하여금 새로이 신설된 농촌부 간사의 업무를 맡게 하고 서울 Y, 선천, 함흥, 고남(대구), 광주, 신의주 등 6Y가 농촌운동을 시작했다고 하여 YMCA 국제위원회는 협약에 따라 19255월에 쌀에 대한 전문가인 아비슨( )씨와 농촌교육에 대한 전문가인 쉽( )씨가 파송되어 왔다. 1928년과 1929년에 외국인이 각각 1명씩 와서 한국인 지방간사와 짝을 지어 19291월부터 홍병선(洪秉璇), 계병호(桂炳鎬), 최영균(崔瑛均), 이순기(李舜基), 이기태(李基台) 등이 주관이 되어 농촌사업을 했는데 중앙와이의 이기태가 신촌의 덴막식 고등농민학교(농민강습소)의 책임자가 되었고, 농촌부간사 홍병선은 중앙지부반과 전국순회를 담당했다고 한다.

농촌사업의 대략의 내용은 정신교욱(종교활동), 보건교육(체육, 성교육, 식생활개선, 가정치료법), 농사개량지도(종자개량, 비료사용법, 원예, 양잠, 과수재배, 임업, 농기구사용관리), 농촌계몽 및 문맹퇴치운동과 협동조합운동이 중요한 사업이었다.

이들 사업의 성과를 보면, 19254월부터 269월까지의 농촌운동의 실적을 보면,

1. 농촌사업조직을 끝마친 촌락수 ---- 23

2. 농촌사업을 실행중인 촌락수 ---- 121

3. 농촌사업을 실행중인 단체수 ---- 16

(Y연합회의 농촌부 소관 3, 도시와이 6, 학생와이 7)

4. 사업에 종사하는 직원수 ---- 161(유급2, 무급 159)

     5. 사업경비 ---- 12,350( 이 경비 중에는 총무나 간사로서 농촌사업을 돕는 직원의 봉급도 포함)

6. 농민회(기타 농촌단체 포함)---- 14

7. 수업을 마친 생도수 ---- 3,500

8. 현재 수업중인 생도수 ----3,200

 

그리고 19269월부터 19295월까지의 농촌사업의 성과를 보면 다음 통계와 같다.

1. 농촌사업조직을 끝마친 촌락수 ---- 188

2. 농촌사업을 실행중인 촌락수 ---- 170

3. 농촌사업을 실행중인 단체수 ---- 18

(Y 연합 농촌부가 직접 하는 것 3, 도시Y 9, 학생Y 6)

4. 사업에 종사는 직원수 ---- 385(유급 37, 무급 362)

5. 협동조합수 ---- 49(조합원수 1,692)

6. 기타 농촌단체수 ---- 90(단체원수 3,910)

7. 사용경비 ---- 9,99839(전임강사의 봉급, 인쇄, 여비 등)

8. 수업을 마친 생도수 ---- 4,856

9. 현재 수업중인 생도수 ---- 5.793 등으로 되어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YMCA 농촌사업은 장로교파와 에큐메니칼운동으로 발전되어 가는데 이런 방향으로의 변화는 1928년의 예루살렘선교대회의 결과였다.

그리하여 19309월에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가 농촌부를 신설하고 ---- 현재 사업은 진행중인 YMCA 농촌부와 협동하기로 결정하고 또한 장감교 양파 선교사로서 조직된 선교부 농업전문가회가 탄생되었다. 그리하여 1929년부터 1934년까지 60여 개의 강습회에서 7,200명의 학생을 수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 사업 중에서도 중요한 사업은 신촌의 고등농민수양소와 농업협동조합운동을 들 수 있다.

 

신촌의 고등농민수양소 : 와이 연합회는 연희전문학교의 땅 12천평을 빌어 가지고 신촌에다 정말식 고등농민수양소를 차려 전국에서 유능하고 열성있는 청년들을 선발하여 193111월부터 시작했는데 겨울 4-5개월 간씩 교육을 실시했다. 수업은 YMCA 간사들과 연희전문학교 교수들이 담당케 했는데 주로 농업기술교육이었고 이기태가 담당했었다.

 

협동조합운동 : 협동조합운동은 1928년 신흥우와 홍병선이 덴막(덴마크)을 시찰하고 다녀온 후 홍병선의 주관하에 진행되었다.

대다수의 농민들이 빚에 쪼들리며 살고 있었다. 연평균 이자가 36리 이상이었다. 이 빚 때문에 농민들은 지주에게 땅을 빼앗기고 그래서 소작인으로 전락되고 나중에는 절망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이러한 빚투성이에서 농민을 구출해내는 운동이 협동조합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남편들이 노름판에 빠져 정신을 잃고 있을 때에 가정부인들은 끼니마다 몇 줌씩의 쌀을 모아 가지고 시작한 것이 1년에 35원의 자본금을 만들 수 있었다. 보통 40가정이 모여서 한 협동조합을 만들었는데 적금이 300원에 이르면 조합원들에게 싼 이자로 영농비, 비료값 등으로 돈을 빌려주게 되었다. 이러한 농민들의 단결심은 농산물 판매에도 적용되었다. 예를 들면 사과의 경우 함흥Y는 사과판매조합을 만들었다. 사과 한 알에 보통 15리밖에 안되는 것을 일본에 수출하면 3전부터 5전까지는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YMCA 간사가 일본까지 출장가서 일본업자와 수천 상자의 계약을 맺었다. 그리하여 농민들은 사과를 협동판매조합에 가지고 가서 일일이 감정을 한뒤 제 1착으로 1천상자를 수출하게 되었다. 그 뒤 4천상자를 수출했다. 이 협동판매조합은 농민들에게 경제적 이익을 얻게 했을 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확신과 희망까지 안겨 주었던 것이다. 협동조합은 신용조합, 판매조합, 소비조합 등으로 그 요구와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써 했다. 이것을 통틀어 협동조합이라 하는 것인데 19295월가지 전국에 협동조합이 49(조합원수 1,692)이었다. 1950년의 통계에 의하면 서울지방에는 협동조합이 11, 소비조합이 5, 판매조합이 11개 있었다. 그때 농민들은 4부 이자가 하면 4부대신 1부로 돈을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314월에는 중앙청년회회관에 협동조합 연합회를 결성하였고, 1932년의 통계에 의하면 협동조합이 65개에 총 자본금이 11,273원에 달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협동조합운동이 활발히 진행된 것은 YMCA의 유능한 전문가들에 의하여 지도되었고 특히 홍병선에 의하여 경기지방이 활발했던 것이며 1930년에는 홍병선은 전문가로서 농촌협동조합과 조의법이라는 협동조합책을 저술했다. 이와 같은 YMCA의 협동조합운동도 일제의 농촌운동 탄압의 시기를 맞아 1933년 농촌진흥운동의 추진에 의하여 부락내의 부락진흥회에 강제로 합쳐지는 수난을 당하면서 1935년경에는 거의 해산을 당하게 되었고 1937년에는 중앙의 협동조합도 해체되고 만다.

이외에 우량종자보급 사업과 우량가축 보급사업도 했으며 YMCA는 농촌운동을 위하여 많은 출판물도 출간했는데 농촌과 관련된 것으로서는 홍병선의 농촌협동조합연구법’ ‘정말과 정말농민등의 단행본의 출판과 이동(里洞)과 기독청년회는 등사판으로 밀어서 출판했으며, 19292월부터는 월간지 농촌청년22백부씩 출판했다.

농민들의 교과서격인 농촌총서’, ‘농촌지남(農村指南)’, ‘농촌요람(農村要覽)’ 등을 발행했다.

이와 같은 YMCA 농촌운동은 당시 기독교가 일반농민대중과의 접촉을 확대하여 선교적 역할에 중대한 역할을 했고 이 사업에 국제기구에서 원조한 자금액은 1929년부터 1930년까지 101천 달러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1934년에는 국제위원회의 농업전문가를 소환해갔고 차츰 지원을 중단하게 되어 농촌사업이 여의치 않았는데 때 마침 농촌진흥운동에 탄압되어 종결되고 말았던 것이다.

자료출처: 한국농민운동사대한YMCA 연맹, 3, 일제식민지하 농민운동중 6) YMCA의 농촌운동과 협동조합운동 부분을 실은 것임.

  

 

자료2>

 

38장 1차 농촌조사와 3대 강령의 발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YMCA31독립운동 직후 제일 먼저 국제무대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뛰어든 다른 무대는 즉 농촌사회였다.

이와 같이 YMCA가 농촌사회에 뛰어든 이유와 동기는 크게 나누어 세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는, 이때까지의 YMCA 운동은 도시 중심이었는데 이것은 자본주의 가 발달된 서구 사회에서는 필요하지만 한구과 같이 자본주의가 발달되지 못하고 아직 봉건 사회를 완전 탈피하지 못한 사회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그당시 총무 신흥우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YMCA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은 미국이나 영국을 통해서 들어왔다. 영국 YMCA는 산업 혁명의 소산이요, 미국 YMCA도 역시 농촌에서보다 도시에서 번창했다. 그러나 한국인의 8할 이상이 농촌에 살기 때문에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방식을 그대로 따를 수는 없다. 물로 YMCA의 운동방식이나 설비나 조직은 파리기준을 토대해야 하지만 같은 문제를 가진 청년들기리 모여서 회를 묶어가지고 그 나라를 찾고 건설한다는 것이 근본 목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YMCA는 다른 나라 도시 YMCA의 방식과 설비와 조직을 그대로 직수입할 것이 아니라, 국민의 대다수가 사는 농촌에서 새로운 방식과 설비와 조직을 만들지 않고서는 무의하다

이상 기본 동기는 그 당시 YMCA 지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둘째는, 일반 청년의 경향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앞장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 사상이 물밀 듯 침투해 들어온 결과 전통적인 사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사조에 대한 관심이 비등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서 민중은 방향을 잃고 청년들은 방황했다. 그 당시의 시대상은 그야말로 극도의 혼란과 공포속에 싸여 있었다. 3천만 민족의 순정을 모아 고이 바친 31운동의 꽃다발은 야만스런 일본 제국주의 군마의 발굽에 채여 여지없이 유린되었고, 금방 찾을 것만 같던 민족의 독립은 수포로 돌아가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신사조만이 휩쓸어 들어오니 여기에는 실망과 비애와 자포자기만이 있을 쁀이었다.

그 당시의 청년들의 고민실망퇴폐 사상을 작가 오상순(吳相淳)씨는 1920년 창건된 폐허(廢墟)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조선은 황량한 폐허의 조선이요, 우리 시대는 비통한 번민의 시대이다. 이 말은 우리 청년들의 심장을 삭이는 듯한 아픈 소리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을 아니할 수 없다.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부정할 수 없다. 폐허 속에는 우리들의 내적 외적 물적인 모든 불행결핍결함공허불만우울한숨걱정근심슬픔눈물멸망과 사의 악이 쌓여 있다 고 했다. 이러한 시대상은 일본 유학생들을 통하여 수입된 자유주의허무주의무정부주의, 그리고 프랑스의 세기말적인 퇴폐주의와 병적 문학의 영향이라 말할 수 있다.

셋째로, 국민의 경제 파탄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31운동 이후 문화 정치를 하는 체하면서 사실은 경제면에 있어서는 더 가혹한 착취를 했기 때문이다. 1920년부터 일제는 15년간에 걸쳐 장기 계획으로 한국 쌀을 일본으로 빼돌릴 계획을 했으며, 그 부족한 양곡은 만주로부터 들여오는 조수수콩 등으로 보충하는 통헤 한국인의 경제 상태는 억망이었다. 그 결과 31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3.4퍼센트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지주가 7년 뒤인 6.10 만세가 일어나던 해에는 3.8퍼센트로 증가하였고, 소작농의 경우 1백만 3천 호였던 것이 7년 뒤에는 11939호로 격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농토를 잃은 농민은 산에 들어가 화전민이 되든지 아니면 북간도나 만주로 남부여대하여 이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직면하여 YMCA가 제일 먼저 벌인 운동은 전국 순회 전도운동이었다. 192071일부터 12월 말까지를 기한하여 전국에 전도대를 파송하게 됐다. 그 전도대의 대장 김필수(金弼秀) 목사는 베드로전서 47절부터 11절까지의 성경 말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심하여 기도하라 ․․․․․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느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라는 말씀을 가지고 전도 대원들을 격려했다. 한편 윤치호(尹致昊) 회장은 무엇보다도 상공업을 발달시켜야 하겠습니다. 세상만사가 돈 없이 되는 일 없고, 먼저 육체의 생활을 유지 못하면 도덕도 지킬 수 없으니 상공업을 진흥시켜 실력을 길러야 하겠습니다. ․․․․․조선인은 종래 실업을 천시하기 때문에 이 모양이 됏으니, 어서 적은 것이라도 상관말고 상공업을 진흥시켜야겠습니다라고 외치는가 하면, 반면에 이상재(李商在) 명예 총무는 무엇보다도 도덕심을 양성해야겠소. 조선인은 과거에 도덕과 정치가 부패한 까닭에 시기와 질투심이 많다․․․예수는 남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쳤으니 그것을 배우서 시기심을 없애야 하겠소․․․․』 라고 외쳤던 것이다.

이보다 더 구체적인 운동은 농촌운동이었다. 우선 신흥우 총무는 한해 겨울을 농촌 조사에 보냈다. 즉 그는 1923년 겨울 서울서 약 30리 떨어져 있는 자마장이라는 동네와 약 100리 되는 부곡리란 동네에서 지냈다. 3개월간 농촌에서 농민들과 같이 자고 먹고 살면서 농촌사정을 자세히 조사했다. 우선 농민들의 실정관습가족문제생활교육종교심리상태 등 전반적인 진상 파악에 노력했다. 이것이 제1단계 농촌 조사이다. 이 조사를 마치고 돌아와 신흥우 총무는 즉시 이를 이사회에 보고하고 다음과 같은 기본 강령을 발표했다. 우리는 모든 국민들의 경제적 향상과 사회적 단결과 정신적 소생을 도모한다라는 강령을 발표했다. 여기의 3대 목표에 대하여 신흥우 총무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 정신적 소생에 대하여 ․․․․1855YMCA 대회가 파리에서 개최되었을때 파리기준이라는 기초선언을 낼 적에 청년들을 하나로 뭉치고 또 그 힘을 합아여 청년들 가운데 그의 나라의 확장을 힘쓴다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 한국과 같이 일제의 탄압으로 독립을 잃고 살 때에 YMCA 운동이 절실히 요구된다. 농촌운동도 농촌 청년들의 정신을 부활시키지 아니하면 성공할 수 없다. 그런데 농촌을 조사해보니 농촌의 청소년들은 거의 다 자포자기 상태에 있다.저희들 같은 촌놈들이 뭘 압니까? 땅이나 파고 살다가 죽으면 되지오한다. 이것이 나라 독립에 제일 큰 장애물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라는 가치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 “도 하나의 사람이다. “도 다른 사람과 같이 눈이 둘 있고, 귀가 둘 있고, 팔다리가 갖추어져 있다. 나쁜 사람이 되려며는 나쁜 사람이 될 수 있고, 훌륭한 사람이 되려며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보다 더 큰 사람도 없고 보다 더 작은 사람도 없다. “도 내 한 몫의 짐을 질 수 있다. 우주에 가득 차 있는 의 힘이 하나가 될 때에는 실패하는 일이 있을 수 없고, “가 하나가 되는 그 순간에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된다.

 

(2) 사회적 단결에 대하여․․․․․․ 어떤 운동을 시작할 때에는 설비도 있어야 하고, 건물도 있어야 하고, 조직도 있어야 하는데, 영국 청년들이 YMCA 운동을 시작할 때는 시설이나 건물도 없이 다만 그들이 굳게 뭉침으로써 큰 세력을 만들게 되었다. 그들끼리 모여서 회를 묶어가지고 운동을 할때에 나라를 찾게 되었다. 한국의 한 농촌에는 30호도 있고, 50호도 있고, 100호도 있다. 그 속에서 청년들이 의논하여 뭉칠 때에는 그것이 유일한 시설이 될 수 있고, 유일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농촌사업이라고 하지마는 이것은 농촌청년들끼리 서로 힘을 합하여 공동의 버녕과 발전을 위하여 일하게 하는 운동이라야 한다. 이름이야 뭐라고 하든지 농촌사업은 거기 있는 청년들이 작정하여 가지고 야학도 조직하고, 공동으로 사고팔 수 있는 협동조합도 만들어서 운영하고, 서로 상조상부하는 공제조합도 만들어서 자기네 문제를 자기네 공동의 힘과 노력으로 해결하고, 향상시키게 하는 운동이다. 사람은 부지런하고 정직만해도 잘 살 수 없다. 사람은 사호적 동물이기 때문에 잘 단결해서 살 필요가 있다. 농촌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네 경제생활을 잘 조직화해서 살 수만 있다면, 한손으로 다섯 말의 쌀을 들 수 있던 사람이 열섬도 들 수 있고, 스무섬도 들 수 있게 될 것이다. 금전을 운영하는데 있어서도 잘 조직만 하면, 이리 옮겨 놓고 저리 옮겨 놓고 하는 가운데 자기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 수 있다.

3. 경제적 향상에 대하여․․․․․․ 우리의 경제 생활이 나아지고 잘 살게 되려면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먼저 각성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먼저 글을 배워야 한다. 가갸거겨부터 배워야 한다. 영웅이 따로 없다. 훌륭한 영웅은 당신네들이 깨달으면 영웅이 될 수 있다. 미국이나 영국이 부유하게 사는데 우리는 그들의 힘을 빌어서 그들에게서 가져오지 않아도 된다. 부와 행복은 당신네마당에서 찾을 수 있고, “당신네울타리 안에 있다. 당신네 동네에 있는 것, 시뻘겋게 된 산, 허옇게 물로 씻겨 나간 강변, 이런 것을 잘 이용할 것 같으면 당신네가 잘 살 수 있다. 씨뿌리는 방법, 종자 고르는 방법, 밭가는 방법, 축산법 등을 배워 주기도 해야 하지만, 경제 생활에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정신적 문제이다. 이와 같은 정신적 소생은 경제 향상과 일정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선 우리는 농촌 청년들에게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어야 한다. 농촌으로 갈때에는 낮에는 그들이 일을 하니까 밤에 가야 한다. 우선 흥미를 끌어야 하니까 무슨 놀이도 해 보고 악기도 가지고 간다. 그리고 어떤 집 마당이나 마루를 얻어서 재미있게 놀아준다. 차츰 친해지면 동네 사람들과 얘기도 한다. 절대로 얻어먹지는 말아야 한다. 그들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되기 때문에 허리에 차고 있던 백철로 만든 밥그릇을 꺼내어 같이 먹는다. 이렇게 되면 단박에 그들은 새사람이 된다. 금방 달라진다. 누가 이걸 하고, 저걸 하소, 하지 마소, 그만두시오 하지 않더라도 자기 정신만 차리게 되면 거기에 굴하지 않고 잘 살게 된다. 경제 향상은 정신적 소생에서 오는 법이다.

이상 신흥우 총무의 설명은 그의 방송 녹음에서 찾아 내어 간추린 것인데, 여기에서 우리는 YMCA 농촌 운동의 기독교적 정신과 사회적 방법이 무엇이었음을 알 수 있다.

 

 

39장 농촌운동의 기본계획과 국제 제휴

 

1차 농촌 기초조사를 마친 YMCA 당국은 1924년 신흥우 총무를 미국에 파송하여, 당시 YMCA 국제위원회 총무 모트(J. R. Mott), 브로크만(Flecher S. Brockman, 한국에 있는 Frank M. Brockman의 친형), 페니(J. C. Penny, Penny Store 백화점 경영자) 씨 등과 만나 레이크 플래시드(Lake Placid)에서 5인 회담을 했다. 5인 회담에서 그들은 우선 다음과 같은 합의를 보았다.

(1) 전국에다 10개 지역을 선정하여 북아메리카에서 파송한 전문간사를 배치한다.

(2) 이 전문간사는 1925년부터 시작하여 1년에 2명씩 5년간에 10명을 파송한다.

    (3) 이 전문간사들은 전부 농촌 문제 전문가라야 하는 동시에 YMCA 정신과 목적에 투철한 사랑으로 한다.

    (4) 조선기독교 청년회 연합회는 10명의 외국인 전문간사와 함께 일할 수 있는 한국인 간사 10명을 가져야 한다

    (5) 각 지역에는 회의도 할 수 있고 교육도 할 수 있는 시설을 구비하며, 농사 개량과 농작물 증산을 시범할 수 있는 최소 한도의 농토를 마련해야 한다.

이러한 기본 계획에 합의를 본 YMCA는 또 다른 회의를 가졌다. 192645일부터 9일까지 5일간 서울에서 한국 YMCA의 농촌사업을 연구 추진하기 위한 세미나를 열게 되었다. 여기 참석한 사람들은 (1) 한국 Y측에서는 윤치호이상재신흥우구자옥홍병선 등 5, (2) 본래 한국에 와 있던 외국인 간사로서 브로크만(F. M. Brockman)반하트(B. P. Barnhart)내시(W. L. Nash)그레그(G. A. Gregg) 4, (3) 농촌사업의 전문간사로 새로 파송되어 온 외국인 기술자로서 어비슨(G. W. Avison)(F. T. Shipp) 2, (4) 국제위원회를 대표하여 브로크만(F. S. Brockman)라이언(D. W. Lyon) 2, 도합 13명이었다. 이것이 곧 간부지도자들의 모임이었다. 이 모임에 대한 보고서는 라이언(D. W. Lyon)씨에 의하여 작성되었는데, 이제 그 보고서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농촌운동의 필요성 ……… 한국에는 75,000명 이상의 인구도시는 서울외에는 하나도 없다. 35,000명부터 75,000명까지의 인구 도시는 6, 35,000명부터 25,000명까지 인구도시는 16, 그래서 이 22개 도시 인구는 약 750,000명이다. 전체 인구의 약 85퍼센트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대다수의 인구에 대하여 무관심하다는 것은 곧 한국에 대하여 사업을 아니한다는 것이 된다. 한국 농민은 심각한 경제난에 빠져있다. 전체 국토의 20퍼센트만이 경작이 가능한 농토이며, 전체 농민의 4분의 3이 소작이다. 더욱이 농민들은 이자가 비싼 빚을 내어서 농사를 짓고 있기 때문에 해마다 총생산고의 30퍼센트 내지 48센트에 해당한 이자를 고리대금업자에게 내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농민들은 서로 협동하여 농사짓는 방법을 개량하고 소기업으로 발전시키지 아니하면 희망이 없다. 농민들은 싼 이자로 농자금을 얻어 가지고 종자를 구입하고, 비료를 사고, 농기구를 살 수 있는 방법과 농산물을 비싼 값으로 팔 수 있는 방법을 모르고 있다. 누구가 이러한 방법을 가르칠 수 있는가? 이것을 하기 위하여 서양 선진국에서 쓰던 방법을 수입할 수 있는가? 한국YMCA는 이러한 절망적인 시기에 부름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외국의 원조가 불가피하다.

(2) 목적 ……… 농촌사업의 기본 목적은 농민들의 정신적문화적경제적 향상에 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농민들로 하여금 하느님과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살게 하며, 일상 생활을 통하여 정신적 가치를 인식하게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글을 가르쳐서 문맹자가 없게하며, 농사의 개량과 협동정신을 키워 줌으로써 그들의 경제상태를 향상시켜야 한다.

(3) 재정 조달 ……… 농촌 운동에 관심이 있는 도시 청년회와 학생 청년회가 필요한 재정과 자원 지도자들을 조달해야 한다. 그리고 해당 농촌은 최소 한도의 집회 장소를 장만하고, YMCA 연합회는 필요한 서적을 제공해야 한다. 물론 YMCA 연합회는 모든 연합회 직원들의 생활비를 전담해야 한다.

(4) 출판물의 조달 ……… 각종 문서와 서적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문맹퇴치를 위한 교과서, 농민들의 이자 문제를 해석한 소책자, 농사 개량에 대한 설명 책자, 그밖의 소책자가 필요하다. 농민들에게서 책값을 받는다면 인쇄비 정도의 돈만 받아야 한다.

 (5) 실무자의 훈련 ……… 도시 청년회와 학생 청년회는 실무자들을 농촌에 파송하기에 앞서 그 실무자들의 지도력 양성과 훈련에 특별히 주력해야 한다. 최초부터 중앙에는 중앙 훈련소를 두고, 지방에는 지방별 훈련소를 두고, 통일된 계획하에서 지도자 훈련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 그리고 지방 훈련소는 그 지방에서 선발된 각 촌락의 지도자들을 훈련한다. 훈련 사업의 성공여부는 훈련에 필요한 시설이 충분하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6) 외국인 간사들의 임무 ……… 외국인 간사들의 농촌사업에 있어서의 주요 임무는 다음과 같다.

외국인 간사는 해당 청년회가 제정한 여러 가지 정책과 원칙을 수행하는 전문가이며, 청년회 사업의 기술자이다.

외국인 간사는 한국인 간사의 자문과 또는 협조자로서 그 업무 집행의 찬조자이다. 업무집행의 전 책임은 수임받은 한국인 간사들에게 있다.

외국인 간사는 청년회와 선교사 단체 사이에서 봉사하는 연락관 구실을 하는 자이다.

그리고 외국인 간사는 청년회와 선교사 단체의 밀접한 연관 관계를 수립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크리스챤이 되게 하며, 지도력을 강화하고 국제적인 이해 증진을 창조하는 자이다.

이상 외국인 간사들의 임무 규정은 그들이 다른 나라에 와서 봉사할 때에 갖기 쉬운 인종 차별의식 때문에 하는 말은 아니다. 다만 문화적 배경이 다른 나날에 와서 일한다는 사실 때문에 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러한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그들이 한국에 오기 전에 얼마나 훈련을 많이 받고 얼마나 교양을 많이 닦았느냐에 달려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의 개인적 능력과 인간성 여하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40장 농촌사업의 개시와 교계 대표자 협의회의 소집

 

……… 중략

반면에 YMCA 운동은 우선 기구 개편을 단행했다. 19252월을 기하여 이때까지 Y 연합회와 중앙청년회의 총무를 겸임했던 신흥우 총무로 하여금 Y 연합회의 총무만을 전담케 하는 동시에, 6월에 기서는 학생부 간사 홍병선으로 하여금 신설될 농촌부 간사를 겸임케 했다. 따라서 11월에는 Y 연합회 내에 농촌부와 도시부를 신설하고 각 위원회에 5인씩의 위원을 선임했다. 그 결과로 평양과 원사Y를 제외한 중앙(서울Y)선천함흥교남(대구)광주신의주 등 6개 도시 Y가 일제히 농촌운동을 시작했으며, 학생Y로서는 숭실전문학교(평양)영명학교(공주)영생학교(함흥)광성고보(평양)송도고보(개성) 등이 농촌 운동을 시작하게 됐다.

따라서 농촌운동의 더 활발한 추진을 위하여 Y기관지인 청년(靑年)19261월부터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 연합회(YWCA)와 협동해서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같은 움직임을 보이자 각 신문은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취재했다. 1925년 벽두 11일자 동아일보의 기사를 보면, 신흥우 총무는 금년부터는 노동 야학을 확장해서 노동자와 무산자를 위하여 고등한 겁보다 보통교육을 실시해서 다대수의 편의를 주려고 합니다. 그리고 금년부터는 사업의 입장을 바구어 도시를 버리고 전체의 8할 이상이나 되는 농촌의 계발을 표준하고 일을 하려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경제적으로 파멸을 당하고 있지마는 정신상으로는 점점 결심하자는 것이 보이므로 장래에 많은 희망을 붙이고 기뻐합니다. 라고 말했으며, 또한 동아일보는 214일자 기사에서 농촌에다 천당 건설이란 제목으로 중앙기독교청년회의 새사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의 도회 생활은 헛생활이다. 조선인의 10분의 8까지가 농촌의 소작인들이다. 조선인은 무엇보다도 농촌 계발에 힘을 써야 되겠다는 취지로써 시내 종로에 있는 중앙기독교청년회에서는 농촌사업을 새로 계획하고, 우선 경성을 중심으로 하여 10리 내지 30리 이내의 여러 농촌으로 전문지지식을 가진 회원을 파송하여 석달(3개월) 동안을 일기로 하고 간이 교육 강습소를 설치하여 문맹의 동포에게 지식을 주어, 농민의 고문이 되어 농작물에 대한 것은 물론이요, 위생에 관한 것이든지 혹은 농가 부업이든지를 무보수로, 직접 원조를 하여 농촌의 향상 발달에 헌신적인 노력을 하리라는데, 때때로 활동사진과 환덩을 이용하여 촌민에게 오락을 주고, 또 한달에 한번이나 두 번씩 명사를 청하여 농민에게 필요한 통속적 강연을 하게 하리하더라고 대대적으로 기사를 취지했던 것이다.

여기에 나타난 노동자 무산자를 위한 사업이라든가 농촌에다 천당건설등과 같은 용어는 그당시 무산대중의 유토피아또는 계급도 없고 차별도 없는 공산 사회 건설과 같은 사회주의자들의 용어와 일맥상통되는 데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러한 용어 사용을 통하여 그당시 청년회가 민중에게 얼마나 적극적으로 호응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보다 앞서 청년회 간사 이대위(李大偉)씨는 더 구체적으로 노동자 농민 운동을 강조한 바 있다. 그는 민중화(民衆化)할 금일(今日)과 농촌개량문제란 제목의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전세계 인구 16억중 1089는 노동자라 할 진대, 그네들을 제외한 이론이 합리(合理)적인 이론이 될 이유가 무엇이며, 그네들을 제외한 운동이 합리적인 운동이 될 것이 무엇인가? 그리하여 과거의 뭇 사회 개조가들 중에 톨스토이와 러스킨 같은 이는 그의 운동중의 최고봉은 오직 농민에게로 나아가라 하였으며, 레닌 같은 이는 전 러시아로 하여금 공산주의까지 실행케 하였으되내지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만도 18백만이라 하고 그중의 농민과 노동자를 제한 외에 다른 계급이 몇사람이나 되는가? 이것이 무엇보다도 절실한 문제이오 긴급한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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