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태동기의 몸짓 : 창설기의 YMCA(1895~1914)
한국YMCA의 창설은 선각적 지사들과 청년들의 자발적인 노력에 의해 그 기초가 마련되었다. 서재필, 윤치호 등이 중심이 된 독립협회운동과 1899년 한국청년 150명의 기독교청년회(YMCA) 설립청원운동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한국YMCA는 1901년 최초의 학생YMCA로 배재학당 학생Y가 조직되고, 1903년 최초의 시청년회(City YMCA)로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창립되면서 역사의 표면에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후, 한국YMCA는 이상재, 윤치호, 김정식, 남궁억 등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운동의 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하고, 상동교회의 진덕기를 비롯한 평민출신의 청년 애국지사들이 가담하면서 교육 계몽, 선교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또한 하령회를 비롯한 활발한 학생사업을 통해 새로운 민족지도력의 배출구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이에 일제는 1911년 테라우찌총독 암살모의사건(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YMCA와 신민회 등 기독교민족운동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감행하였다.
<이상재, 윤치호 선생을 비롯한 창립초기 YMCA 지도자들>
1899년
150여명의 한국 청년들이 YMCA의 창설을 요구함으로써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두 선교사의 요청으로 북미 YMCA연합회 국제위원회가 한국YMCA 창설을 결의한 바 1901년에 질레트 파송
1903년 10월 28일
한국 처음의 YMCA인 서울YMCA가 <황성기독교청년회>로 창립
1905년
실업,체육 등의 교육사업 본격화
한국에서 처음으로 공업실기교육 실시
1906년
동경에서 재일본 한국YMCA를 조직
한국 최초로 유도 시작
1907년
질레트가 우리나라 처음으로 농구 소개, 보급
야구 시작
1908년
구황실을 비롯한 현홍택 등 국내 유지들의 연조와 와너메이커의 거액 기부로 3층 벽돌양옥 약 600평의 회관을 준공
스케이트 운동 시작
1909년
음악교육 활동 시작
현대스포츠를 본격적으로 보급
1910년
진관사에서 제1회 YMCA학생하령회를 개최하여 야외교육의 효시를 이룸
(2) 연합회의 창립과 운동의 기틀을 다지며 : 1914년(전국연합회 결성) ~ 1923년
105인 사건과 유신회 사건 등 잇달은 일제의 탄압으로 윤치호, 김규식, 이승만 등 주요 지도력들이 투옥, 망명, 추방당하는 속에서도 한국YMCA는 1914년 4월 개성 한영서원에서 1개 시청년회와(황성기독교청년회 -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로 강제개명)와 9개 학생Y 대표 45명이 모인 가운데 전국조직으로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를 결성하였다.
3․1운동의 과정에서도 YMCA는 그 가교의 역할을 다하였다. 재일본 조선기독교청년회 회관에서 일본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발표하였으며, 국내에서는 3․1독립선언의 33인 민족지도자 가운데 9인이 YMCA를 통해 배출되었다.
3․1운동 이후 연합회는 새로이 시청년회의 조직에 힘쓰는 한편으로, YMCA 기간사업의 하나인 학생사업을 조직적으로 지도해 나가기 위해 1921년 학생부를 설치하고, 1921년 3월부터는 새로운 사회사상과 기독교사상을 소개하는 월간 종합지로 [청년]을 발행하였다.
1914년
YMCA연합회를 조직
중앙청년회보를 창간하여 문서선교운동 시작
1919년
재일본 한국 YMCA에서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2.8독립선언 선포
1921년
중앙청년회보를 월간<청년>으로 개명
1922년
월남 이상재선생은 민립대학 기성회를 설치했고, 소년척후단 총재로 취임하는 동시에 물산장려운동, 금주운동 등을 전개
(3) 민족의 살길을 찾아서 : 1923년 ~ 1938년
1923년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로 독립한 한국YMCA는 세계연맹에 단독으로 가입하여 활발한 국제활동을 통해 민족운동의 국제적 역할을 담당하는 한편으로,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 기성운동 등 1920년대 전반 국내 민족운동 - 실력양성운동의 과정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0년대 중반이래 YMCA 사회운동 가운데 가장 특기할만한 부분은 농촌사업의 대대적인 전개였다. 1925년 연합회에 농촌부를 설치하면서 본격화된 YMCA 농촌사업은 '정신의 소생', '생활의 조직', '농사개량'을 3대 강령으로 삼고, 도시중심 봉사중심의 서구적 YMCA의 모델에서 벗어나 전국민의 8할 이상이 살고 있는 농촌에 운동의 뿌리를 내리는 것을 목표로 정력적으로 추진되었다.
그 결과 YMCA 농촌사업은 1929년 현재 YMCA 촌락 227개, 야학생 10,507명, 협동조합 22개, 농민회 82개, 회원 4,128명, 그리고 전국 19개 도시의 농민학교 설립 등 다대한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또한 연합회는 농촌사업의 효율적 전개를 위해 1928년 전국을 중앙, 관서, 관북, 호남, 영남 등 5개의 지방부로 나누고 각기 간사를 배치함으로써 도시Y, 학생Y, 농촌Y를 포괄하는 명실상부한 지역적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이밖에도 YMCA는 교파를 초월한 평신도운동체로서 이 시기 한국 에큐메니칼운동을 주도해 나갔으며, 1927년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사이의 협동전선으로 신간회(회장:이상재, 중앙청년회관에서 결성)가 출범하는 과정에서도 좌우합작과 지역차원 사회운동의 거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편, 일제의 탄압이 한층 드세어지는 가운데 한국YMCA는 1935년 적극신앙단 사건과 내부의 지도노선 갈등으로 신흥우 총무가 사임한데 이어, 연합회의 기간부서인 학생부와 지방부가 폐지되고, 농촌부 역시 유명무실해지는 등 커다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여기에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이 일어나 YMCA 지도력들이 대거 검거됨으로써 연합회의 활동은 거의 중단상태에 놓이게 되었으며, 1938년 8월 급기야 일본기독교청년회 조선연합회로 개편되는 굴욕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1924년
농촌사업 추진. 1929년에는 240개 지방에 협동조합, 농민회, 농민학교 등을 조직, "정신적발전소"가 되다.
덴마크 유연체조 도입 및 보급, 권투부 설치, 우리나라 최초로 권투경기 시작
1932년
기독연구회를 조직 전국적으로 적극신앙운동 전개
1938년
일제의 심한 탄압으로 기능 마비
1945년
8.15해방과 동시에 한국YMCA 재건 시작
(4) 전통의 단절과 재건의 굽잇길 : 1945년~1970년
1945년 8․15 해방과 더불어 한국YMCA는 일제 말기의 극심한 탄압으로 지도력과 조직력이 고갈된 상황에서도 재건을 위한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1938년 이래 중단상태에 있던 남녀학생 하령회가 다시 시작되었고, 연합회 기관지로 [청년]이 복간되었으며,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3년 대회가 1948년부터 재개되었다. 6.25전쟁으로 한국YMCA는 연합회 회장 양주삼, 증경총무 구자옥 등 다수의 지도력들이 납북되고 종로의 서울Y 회관 건물이 전소되는 등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이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부산 피난 기간 중인 1952년 1월 연합회는 YMCA전문학원을 개설하여 체계적인 간사지도력 양성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또한 각지의 YMCA들은 재정과 역량상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궁핍과 사회적 부조리로 인한 시대의 짐을 나누어지려는 전후복구 사회봉사 프로그램을 전개하였다.
학생Y 역시 해방후 자생적으로 일어난 기독학생운동을 기반으로 하여 1952년 18개 대학 30개 고등학교의 학생Y들로 학생Y전국연맹과 하이Y전국연맹을 결성함으로써 재건의 열매를 맺기에 이르렀다. 이후 Y학생운동은 이념 및 방향의 정립과 프로그램의 빈곤에 주력하면서, 1959년 학생YWCA연합회, 기독학생회전국연합회(KSCF)와 함께 통일된 한국학생기독교운동을 위한 본격적 발족으로 한국학생기독교운동협의회(KSCC)를 조직하였다.
학생Y의 재건외에도 YMCA전문학원에서 훈련을 받은 전문사역자들에 의해 소년사업(하이Y, 중학Y, 어린이Y)이 활발히 전개되어 전국의 거의 모든 시청년회에서 주요 목적사업으로 발전하였다.
1960년 4월혁명을 경험하면서 YMCA는 내적인 비판과 혁신의 요구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한국YMCA는 기사학생의 노력으로 1962년 3개년 전진운동을 시도했으나, 재정자립 문제와 군사독재의 등장으로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1945년
8.15해방과 동시에 한국YMCA 재건 시작
1947년
난지도를 서울YMCA 캠프장으로 확보함
1949년
우리나라 최초로 펜싱 시범경기 실시, 펜싱부 설치
1950년
6.25전란으로 YMCA회관 불타 파손됨
1951년
피난중 부산에서 활동 재개, 전시구호사업 전개
1952년
난민구호 및 무산아동 교육사업 전개
1953년
난지도에 삼동소년촌을 설립
하이Y 사업 전국적으로 확대
1958년
회관재건운동 개시. 1963년에 새 회관의 제1차 단계(3층)를 마치면서 한국 최초의 실내수영장을 갖게 됨.
1967년
서울 YMCA회관 준공
학사단운동 전개
청소년상 심포지움 개설
YMCA 호텔사업 시작
사회인 베드민턴 선수권 대회 개최
상급 인명구조원 강습회 개최
1968년
시민논단을 위시한 시민의식 개발사업 전개
건전노래부르기 운동 전개(싱얼롱Y 발족)
1970년
영등포지회(양평동) 개설
어린이 프로그램 시작
Mr.YMCA 선발대회 개최
(5) 새로운 전환점을 찾아서 : 1970년 ~ 현대
70년대 접어들면서 한국YMCA는 운동성 회복과 사회적 책임에 대한 신학적, 기구적 각성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는 군사독재와 급속한 산업화, 에큐메니칼 운동 차원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개발과 정의에 대한 신학적 성찰과 기독교 주체성에 대한 YMCA내의 위기의식 고조 등 안팎의 여러요인들이 상호작용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대한YMCA연맹은 1969년 제 20차 전국대회를 계기로 사회개발사업을 모든 것에 우선하는 사업으로 전환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1971년 제21차 전국대회의 결의로 설치된 '사회개발특별위원회'는 '시민의식 개발' '지역사회 조직', '직업기술교육'등으로 세부사업계획안을 작성하고, 전국적 규모로 이를 실천에 옮겨 나갔다. 이들 사업은 1973년까지 활발히 진행된 후 70년대 중반부터 연맹에 의해 새롭게 착수된 농촌사업에 수렴되었다.
연맹주도하의 농촌사업은 1)농민자신의 이익을 기초로 농민자신의 조직을 확대하는 일, 2)농민을 의식화하고 그들을 한데 묶을 수 있도록 농민을 교육하는 일을 과제로 삼아 1974년부터 16년 동안 3단계에 걸쳐 전개되었다.
한편, 전세계적으로 YMCA의 정체성에 대한 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한국YMCA는 1974년 <목적과 사업연구위원회>를 신설하여 한국YMCA운동의 '신학적 반성과 그 존재이유를 재규정'하는 이른바 'YMCA이념추구'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인식에 기초하여 한국YMCA는 1976년 제23차 전국대회에서 [한국YMCA목적문]을 제정함으로써, 1973년 캄팔라원칙 수립 이후 자기 목적문을 가진 세계 최초의 기독청년회가 되었다.
지도력 양성 및 운동담지체 형성과 관련하여 한국YMCA는 간사자격규정과 교육과정을 한층 더 엄격히 하여 수행하는 한편, 1969년 통합 KSCF로 이관되어진 대학Y를 대신하여 YMCA운동성과 청년성을 담보하는 운동담지체로서 청년Y를 조직하는데 주력하였다.
청년Y는 1973년 6월 제1회 청년Y 클럽 전국대회를 개최한 이래 성장을 거듭하여 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전국대회 참가인원이 천명 수준에 이르게 되었으며, 현재는 해당 시청년회의 핵심 행동세력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70년대 이래 YMCA의 전환노력을 통해 두각을 보인 부문은 민주시민운동이었다. 군사독재 하에서 통제된 언론이 담아내지 못하던 시민들의 민주여론을 수렴해 나감으로써, 시민의 의견을 여론화함과 동시에 민주적인 시민의 훈련에 기여한 YMCA '시민논단'을 비롯하여, 부당한 피해를 입은 시민들의 권익옹호 차원에서 시작하여 포괄적인 시민주권운동으로 발전해 나간 시민중계실 사업, 그리고 외채, 교육, 공정선거, 양담배, 수입농산물, 향락문화, 물가, 환경, 청소년문제 등 시민사회의 주요 관심사에 대한 올바른 여론을 형성하고 이를 정책화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전국규모로 전개된 시민자구운동은 모두 1980년대에 이르러 전국 주요 도시YMCA의 목적사업으로 확산되어 나갔으며, 시민여론의 커다란 호응은 물론 시민운동체로서 YMCA의 존재를 시민들에게 각인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73년
서울YMCA 사회개발단 출범
전국 어린이 유도대회 개최
1974년
양곡은행 운영 시작
청년문화 개발사업 <징검다리> 시작
1976년
우남 이원철박사 전재산 기부(갈월동 가옥 및 금곡리임야 등 3만6천여평)
재일본 한국YMCA 재건을 위한 기성회 조직
아기스포츠단 창단
1977년
원로회원 유광렬 선생 일산에 임야 4만8천여평 기부
1978년
시민중계실 개설
시민의식 프로그램 시작
영동 간이운동장 개장
1979년
송파지회(잠실) 개관
영등포지회 푸른세대 운동본부 개설
1980년
원로회원 유광렬 선생이 기부한 임야에 YMCA 수련장 준공
재일본 한국YMCA회관 준공
1983년
서울YMCA 사업연구회 시작
여성사회교육센터 개설
1984년
미국 그레이터 뉴욕YMCA와 자매결연
청소년 성교육상담센터, 해외동포 결혼상담센터, 고덕청소년센터 개설
예비대학, 청소년문화광장, 어린이동요부르기 문화프로그램 신설
선교 100주년 기념 기독교사상 심포지움 개최
1985년
타이완 타이페이 YMCA와 자매결연
외채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자구운동 결의대회 및 운동본부 설치
TV바로보기 운동 전개
소년 탐험대 조직 및 활동 전개
1986년
강남지회(논현동) 개관(이원철 박사를 기념하여 강당을 "우남홀"로 명명함)
경희궁 청소년회관 개설
일본 나고야YMCA와 자매결연
월남 이상재 선생 동상건립
국산타이어 사용장려 캠페인
양담배 추방운동 전개
제24회 대한민국 체육상 수상
1987년
영등포지회 회관(문래동) 이전
송파청소년회관(마천동) 개관
청소년 유해 출판물 감시운동 전개
1988년
미국 호놀눌루YMCA와 자매결연
88서울올림픽 개최시 한강축제 주관
1989년
향락문화 추방 시민운동 전개
상계 근린공원 사회체육센터 개관
건전비디오문화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 발족
1990년
카나다 토론토YMCA와 자매결연
TV시청자운동 전개
서울YMCA 간사 사업연구회 시작
환경보전 시민운동 결의대회 및 활동 전개
한강시민공원 망원수영장 개설
청소년 진로진학상담실 개설
1991년
핀란드 헬싱키YMCA와 자매결연
지역민주주의와 참여를 위한 시민운동 전개
재일본 한국Y 부채 해결을 위한 캠페인 전개
생활협동운동 전개
중구청소년수련관(만리동) 개관
의정감시단 활동 개시
한강 시민공원 광나루수영장 개설
1992년
동대문지회(장안동) 개관
자원재활용 시민연대회의 구성 활동시작
유엔 환경개발회의(UNCED) 서울지역위원회 조직활동 개시
바른선거문화 형성을 위한 시민운동 전개
Y 체육논단 재개
청소년 쉼터(가회동) 개설
청소년 쉼터(가회동) 개설
1993년
서대문지회(홍은동) 개관
브라질 상파울로 YMCA와 자매결연
Y 90년 운동사 발간
부정부패추방 시민운동 전개
한강물 되살리기 시민운동 전개
동대문지회에 청소년 약물상담실 개설
청소년 전용광장 개설
주부 및 고령자 취업대비 훈련 실시
1994년
서초지회(반포동) 개관
방화11 종합사회복지관 개관
시민환경 감사운동 전개
녹색청소년단 조직 및 활동 전개
보육교사 교육원 위탁기관 선정
1995년
안전한 서울 만들기 시민운동 전개
지방자치선거 공선협활동 전개
시청자 옴부즈만 개설
청소년 문화유적지 순례캠프 개시
청소년 자원봉사 활동 프로그램 개시
시민안전 감시단 발족
일본 스즈끼 교수 초청 덤벨체조 강습회 개최 및 보급
1996년
싱가폴 YMCA와 자매결연
녹번종합사회복지관 개관
바른선거문화 정착을 위한 서울공선협 활동 전개
북한수민돕기 쌀 모으기 전개
시민영화감시단 조직
녹색 청소년단 도시생태환경 탐사 활동 전개
녹색서울시민워윈회의 서울의제21 만들기 운동 참여
15대 총선 서울 공선협운동 전개
1997년
녹색소비문화 정착을 위한 Y녹색가게운동 실시
청소년 푸른문화 가꾸기 운동 출범
외국인 노동자 중계실 개설
열린정보센터 개설 및 YMCA 인터넷 홈페이지 운영
15대 대선 서울 공선협활동 및 TV토론 시민평가위원회 활동 전개
1998년
강서프로그램센터(화곡동) 개관
청소년보호대상수상(청소년보호위원회)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YMCA회원 금모으기 운동 전개
실직자를 위한 고용지원센터 개설 및 고용상담원 교육
결식아동을 위한 사랑의 먹거리나누기 운동 전개
청소년쉼터(서교동) 이전
청소년 영상페스티벌 개최
창립 95주년 기념식 및 가출청소년 쉼터 건립기금 마련 자선 콘서트 개최
녹색가게 확장(종로회관, 서대문지회, 방화11종합사회복지관, 구파발 녹색가게 개설)
월남시민문화연구소 설립
수지프로그램센타 개관(용인시 수지읍)
베트남 한국계 청소년 기숙사 건축비 지원
1999년
양천지회 개관(목동)
28 독립선언 80주년 행사
먹거리나누기운동협의회 창립
2000년
강서프로그램센터 확장 이전(강서구 염창동)
목요성서강좌 실시
일본동경YMCA와 자매결연
제16대 총선 청년유권자연대 활동 전개
의료개혁시민운동 의약분업정차 시민운동본부 활동 전개
다락원캠프장 인수 운영
제일본한국YMCA 한국문화관 개관 및 신축 부채 문제 해결
몽골지역YMCA 창립 지원
2001년
전력문화회관스포츠센타 개관
아하!청소년성문화센타 개관
녹새가게운동 제5회 서울환경상 대상 수상
교복공동구매네트워크 발족
도시문화학교 '종로북촌문화산책' 개설
2002년
유권자 10만인 위원회 발족식
서울YMCA 체육논단
서울시장후보 검증․평가 유권자 만민공동회
이동전화요금인하 캠페인
진로진학 상담축제 "네꿈을 펼쳐라"
전국 어린이 녹색소비대회
(6) 21세기를 맞으며
한국YMCA의 역사는 사명을 위한 긍정의 역사라기보다는 사명을 위한 부정(Negation)의 역사였다. 분단과 독재와 비인간화로 얼룩진 지난 반세기의 역사 속에서도 한국YMCA의 부정을 통한 긍정 도출의 노출은 계속 되었다. 특히 70년대 중반 이래의 '전환' 노력을 통해 한국YMCA는 차츰 자기이해의 자리에서 공헌의 자리로, '받는 YMCA'에서 '주고 받는 YMCA'로 옮겨 앉으면서 국제적 차원에서도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제 전국에는 50여개의 도시YMCA가 설립되어 있다. 그러나 이같은 기구확장과 살림의 정착이 한국YMCA의 궁극적 목적은 아니다.
21세기를 맞으며 한국YMCA에게는 내부적인 연대와 나눔을 재정, 프로그램, 이념의 추구와 발전의 제 측면에서 한층 더 강화하는 일, 우수한 유자격 전문지도력을 확보하고 양성하는 일, 개방화와 국제화의 추세 속에서 한국YMCA의 주체성을 명확히 정립하고 그 사명을 다하는 일, 민족의 염원이며 과제인 평화통일운동의 제 몫을 담당하는 일, 세계YMCA에 창조적으로 참여하며 공헌해 가는 과제가 놓여져 있다.
-2003년 서울YMCA100주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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