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YMCA를 만든 선교사들 ①
이윤희 (한국YMCA 생명평화센터 사무국장)
* 국민일보 3월 13일 자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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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뉴욕YMCA 본부에다 청원서를 발송하기 전에, 어느 주일날 오후 몇몇 청년들을 나의 집으로 오라고 청했다. 그때 나는 5명 또는 6명 정도의 청년들만이 모이더라도 큰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뜻밖에 그네들이 너무 많이 온다고 해서 그 계획을 포기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처럼 많은 청년들을 수용할만한 응접실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150명의 청년들이 진정서에 도장을 찍고 YMCA를 설립해 줄 것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언더우드·H.G.Underwood)
한국YMCA의 시작은 1899년 YMCA 국제위원회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한국 청년 150여명과 함께 벌인 청원운동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들은 당시 한국교회에 참여하지 못했던 상류·지식계급 청소년들을 전도할 목적으로 한국Y의 설립을 요청한 것이다.
“무엇보다 청년회가 창설되면 교회가 이때까지 포섭하지 못했던 청년들을 많이 포섭할 수 있다…. YMCA를 창설하려면 정회원 즉 세례교인이 있어야 할 것인데, 정회원은 배재학당 학생 중에서 제일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상류층 청년들이 많이 관심을 가지고 찾아올 것이다….”(아펜젤러·H.G.Appenzeller)
당시 한국교회의 고민은 중국 선교사였던 브로크만이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전한 이야기를 통해 엿볼 수 있다. “기독교를 알고 싶어 했던 한 양반이 몰래 평민으로 가장하고 교회 뒷문으로 들어와 앉았는데, 바로 옆줄에 자기 하인이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질겁하고 나갔다.” 당시 교회가 상류계층에 접근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한국 최초의 교회인 새문안교회와 정동교회를 각각 설립, 장로교 및 감리교를 세운 선교사이다. 또 연희전문학교와 배재학당을 세운 교육가인 동시에 생활인 기독운동체로서 한국Y운동의 씨앗을 뿌린 주인공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눈여겨볼 것은 한국Y운동은 선교사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수용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언더우드가 언급한 것처럼 당시 개화 지식인 청년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요청되었다는 사실이다.
청년들이 YMCA청원운동에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1899년은 전년도 12월 독립협회가 해산된 이후 모든 민회(民會) 설립과 활동이 일절 금지됐던 시기다. 이러한 때 개화 지식인 청년들은 기독교 국제운동 단체인 YMCA를 통해 민회(民會) 운동을 만들어가고자 했다. 이는 곧 1901년 배재학당Y로부터 한국Y가 시작되는 배경이 된다. 결국 9개 학생YMCA와 시(市) 청년회인 황성기독교청년회 1곳이 연합해 1914년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지금의 한국Y전국연맹)가 창립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 최초의 민간운동의 출발이기도 하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요청으로 1901년 한국Y의 초대간사로 질레트(P. L. Gillett)가 파송된다. 질레트는 영·독·일·중·러 등 각국 대표자들과 각 교파 선교사들을 초청, 한국 역사상 최초의 ‘각국 대표자 회의’를 소집했다. 이때 선출된 위원장이 헐버트(H. B. Halbert)였다.
헐버트와 질레트는 Y회관을 짓기 위해 기금을 모금하고, Y헌장 초안을 작성하는 등 황성기곡교청년회 창립(1903년 10월 28일)에 크게 기여했다. 초대총무로 취임한 질레트는 성서연구반을 조직하고 야구, 농구 같은 스포츠를 보급하는 등 Y를 통해 근대 시민을 육성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공헌은 ‘105인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사건은 1911년 일본총독부가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의 암살미수사건을 조작, 기독교인을 포함한 105인의 독립운동가를 감옥에 가둔 사건이다. 이들 가운데 윤치호 황성기독교청년회 부회장이 있었다. 질레트는 이 사실을 국제선교협의회의 영국 에딘버러 본부에 용감하게 폭로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총독부는 질레트와 Y를 향한 탄압은 거세졌다. 결국 질레트는 Y를 지키고자 자진 사표를 냈고 이후 입국이 금지됐다.
게일(J. S. Gale) 목사 역시 한국Y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황성기독교청년회 창설 이사이자 회장이었던 그는 한국 역사와 문화에 깊은 사랑을 지닌 인물이었다. 게일 목사의 가장 큰 공헌은 교회와 사회를 연결하는 Y지도자를 배출하고, 한국 교회와 Y간의 협력 관계를 증진시켰다는 것이다.
1904년, 연동교회 담임 목사였던 그는 출옥한 이상재, 김정식, 유성준, 이원긍 등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교인으로 맞아들이는 한편 Y회원으로 끌어들였다. 게일 목사는 또 한국교회의 평신도 운동을 육성했으며 기성교회로 하여금 교회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 속으로 향하게 만든 선교사로 평가받고 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질레트와 헐버트, 게일 선교사 등 이들 초기 선교사 5인방은 한국Y의 씨앗을 뿌렸다. 그들의 헌신은 윤치호, 이상재, 신흥우, 김정식, 조만식, 전덕기, 김규식, 남궁억, 이승훈, 이승만 등 한국Y운동 지도자들에 의해 뿌리를 내리게 된다.
국민일보 기사 전문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8128220&cp=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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