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과 한반도, 평화에 이르는 길
- 힘의 평화와 하나님의 평화
이윤희 / 한국YMCA 생명평화센터
2018. 7. 1. 새길교회
(주) 새길교회 교우들과 팔레스타인 이슈를 나누기 위해 만든 자료이다.
1. 팔레스타인으로 향한 시선 1) 한국 역사와 기독교를 다시 생각한다. 2) “생명평화의 눈으로 성서 다시 읽기”- 정복과 패권에서 해방과 나눔으로. 3) 팔레스타인으로 향한 시선, 한반도 평화를 위한 발걸음
2.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역사 1) 요약 2) 2017년, 2018년. 밸푸어 선언 100년, 누구의 평화인가? 3) 팔레스타인의 현실, 누구의 눈으로 볼 것인가? 4) 누구의 눈으로 말할 것인가? 하나님의 평화
3.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의 호소와 요청 1) 카이로스 팔레스타인 선언 2) “대안성지순례의 시작 - Come & See”
4. Come & See, 팔레스타인 이야기 1) 팔레스타인 성지순례와 홈스테이 2) 분리장벽과 검문소(Check point) 3) 팔레스타인 난민캠프 4) 파괴되는 주거 가옥 5) 사라지는 베두인(Beduoin) 학교와 마을 6) 팔레스타인 청소년들과 교육 7) 이스라엘 시민의 딜레마, 안보(security)와 민주주의(Democracy) 8) 평화를 위해 일하는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
5. 예루살렘을 둘러싼 문제 1) 예루살렘 갈등의 역사 2) 주택 파괴 House demolitions 3) 동예루살렘 팔레스타인 주거지 Palestinian residency 4) 고립된 동예루살렘 5) 미대사관 이전
6. 마무리 - ‘불가능한 순간’에 말하는 하나님의 평화, 민에 의한 평화?
(참고자료) 팔레스타인기독교단체연합(NCCOP)이 WCC와 에큐메니칼 운동에 보내는 공개서한 |
“진실을 말할 때가 왔다. 고난 받는 팔레스타인 민족의 가슴 속에서 우러나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말씀을 전할 때가 왔다.” “우리는 전 세계 교회를 향해 ‘와서 현실을 보라’고 호소한다. 우리는 여러분을 평화와 사랑과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는 순례자로 받아들이며, 여러분에게 최선을 다해서 우리의 참된 현실을 전할 것이다. 여러분은 이 땅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민족의 삶과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카이로스 팔레스타인 선언에서. 2009.)
“나는 숨 쉬고 생각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자유를 생각한다. 나도 세상의 다른 사람들처럼 살고 싶다.”(베들레헴 분리장벽에 쓰여진 문구)
1. 팔레스타인으로 향한 시선
1) 한국 역사와 기독교를 다시 생각한다.
목회자와 개교회 중심의 맘몬화된 한국 교회에 대한 소망을 상실하고 있을 때 만났던 예수의 땅 팔레스타인. 2천 년을 지속해온 그들의 신앙과 하나님의 평화를 궁금해 하며, 2008년부터 나는 새로운 신학적, 신앙적 계기를 찾아 팔레스타인을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교회에 팔레스타인은 그 수많은 성지 순례객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금단의 사과와도 같은 영역이자, 악마화된 신앙적 대결 상대로 남아 있는지 모른다. 한국의 성지순례 객들은 성서의 이스라엘과 현실 국가 실체로서의 이스라엘을 구분하지 않고 있으며, 팔레스타인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른다.
2012년 11월,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발생한 전쟁과 점령, 인권 유린을 묵인해 온 한국 교회의 죄를 참회하며, 팔레스타인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 형제임을 밝히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평화를 위한 한국 그리스도인 신앙선언’을 발표한 바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한국 기독교가 테러리스트와 이슬람을 옹호하는가?”라는 질문과 “팔레스타인 지지는 기독교 신앙에 어긋난다.”는 응답을 받았다. 한국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팔레스타인에 대해 선뜻 이야기하기를 주저한다. 연민과 부채 의식의 눈으로만 바라보고 있거나, 종교 간 갈등으로만 해석하기도 한다.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는 지금의 이스라엘이 ‘2천 여 년 동안의 디아스포라(Diaspora)를 끝낸 위대한 하나님의 백성’이며,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을 건설한 것은 정당하고 의로운 행위’라는 인식이 팽배한 것 같다. 팔레스타인에 대해 우호적인 글을 쓰기라도 하면, ‘기독교인이 왜 이스라엘을 편들지 않고 팔레스타인 편을 드나?, 이슬람과 테러를 지지하냐?’라고 종종 힐난의 소리를 듣곤 한다. 이렇듯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주제들은 자칫 신앙적, 신학적, 정치적 시비에 휘말리기 쉽고, 많은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은 애써 이를 외면하며 침묵을 선택하기도 한다. 마치 성소수자 이슈와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 또한 한국교회의 무조건적인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나는 한국 교회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대한 신학적, 정치적 편견을 극복할 수 있을 때 한국 교회는 평화의 교회로 부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약속의 땅과 선민의식 그리고 정치적 시온이즘’을 바탕으로 한 패권과 제국의 종교에서 벗어나 세상과 다른 ‘하나님의 평화’를 이루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생명평화의 눈으로 성서 다시 읽기”- 정복과 패권에서 해방과 나눔으로.
“구원과 해방의 하나님으로 알려진 성서의 하나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편파적이며 차별 대우하시는 하나님으로 보인다. 이스라엘 국가가 설립되기 전에는, 구약성서가 예수를 예언하고 증거하는 기독교 성서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받아들여졌다. 이스라엘 국가 형성 이후, 유태인들과 기독교 해석자들이 구약성서를 시온주의의 성서로 보는 것이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에게는 불쾌하기 짝이 없다.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어떻게 구약성서가 시온주의도 뒷받침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는지가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풀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숙제이다.”(예루살렘 성공회의 아티크(Naim Ateek)신부)
팔레스타인은 한국 기독교의 성서읽기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특별히 성서의 이스라엘과 지금의 이스라엘 국가를 구별하지 않은 채,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국가 건설과 점령을 성서적 예언의 성취로 보는 기독교 시오니즘(Christian Zionism)과 그것이 한국 기독교에 미치고 있는 영향, ‘선택된 백성과 약속의 땅’에 대한 분별력은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과제이다. ‘선민사상’, ‘땅에 대한 약속’, ‘가나안 정복’ 등은 중세 십자군 전쟁의 명분이었으며, 근대 유럽의 전 세계에 걸친 식민주의와 침략 이민자들에게는 그들의 정복과 학살을 정당화하는 종교적 이데올로기였다. 십자군들은 '여리고 성'을 함락하고 스스로가 공포감을 느낄 정도로 살육을 자행하고, ‘이것은 성서에 따른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었다. 근대 유럽에 의한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지화하는 역사와 이스라엘에 의한 팔레스타인 점령도 이에 속한다. 남아프리카 신학자 모살라(Itumeleng J. Mosala)는 이 이야기들이 백인들에 의해 아프리카 흑인들이 당하는 억압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 윤리적 권위를 상실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과 약속의 땅에 대한 믿음이 이런 식민지 정복자들의 합리화를 위한 이데올로기로만 기여했던 건 아니다. ‘가라 모세(Go Down, Moses)’라는 흑인영가에서 볼 수 있듯 땅을 잃고 억압받는 이들의 희망과 자유를 위한 투쟁의 모델이기도 하였다. 한국 기독교 또한 이와 같은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는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라는 절망의 땅에서 새로운 희망과 비전을 주는 신앙이었다.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애굽 땅 노예들의 탈출과 해방이라는 이야기로 절망을 견디었고, 제국주의 총칼 앞에서도 해방과 자유를 말하고 정의를 행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대한 믿음으로 전쟁과 분단으로 갈라진 민족 앞에 새 희망과 새로운 세상을 설파했고 한민족의 단결과 평화를 이루기 위해 수고해온 역사를 갖고 있다. 한국 기독교는 이와 같이 인종차별과 식민지의 땅에서, 전쟁과 분단이라는 고난과 수난의 역사에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향한 신앙이자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과 나눔을 만들어가는 평화와 치유의 종교였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는 지금 어디에 있으며, 누구의 자리를 탐하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한국 사회의 병리 현상이 되어 버린 한국 기독교의 현실에 대해 한국 교회의 성서해석과 신앙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일제 강점기 신앙의 선조들이 말했던 모세와 여호수아가 지금 한국 교회에서는 어떻게 불리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팔레스타인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고백과 질문을 통해 다시 성서읽기를 함으로써 한국 기독교를 성찰할 수 있는 힘을 회복해야 한다.
3) 팔레스타인으로 향한 시선, 한반도 평화를 위한 발걸음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 대한 관심은 한국 시민사회의 평화담론을 만들어 가는데 중요한 연대와 협력의 과정일 뿐만 아니라, 한국 기독교가 평화의 종교로 변화하기 위한 신학적 노력이기도 하다. 팔레스타인 이슈는 한반도 평화와 한국 교회의 문제가 거의 고스란히 담겨있다. 지정학적 국제정치의 패권질서 아래에서 갖는 70여 년의 수난의 역사적 경험과 현실, 그리고 그로 인해 배태된 많은 유사한 문제들-난민, 통합(통일), 땅, 국가 형식과 체제, 화해와 치유, 제국의 종교 등. 이것은 한국 기독교의 신학적 주제일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치열히 답을 구해야 하는 문제들이다. 더구나 ‘패권과 제국의 정치’, ‘이에 봉사하며 선두에 서 있는 종교와 신학’, 그리고 ‘평화’, 이 세 가지 접점의 핵심에는 한국 기독교가 있다. 한국 기독교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위치이자 한국 개신교가 한국 시민사회와 세계 기독교에 평화로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이기도 하다. 한국 기독교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을 만나야하는 이유이다.
지난 해 20여 개국 청년들과 분리장벽 아래에서의 평화의 대화 경험은 예수의 땅, 팔레스타인이 왜 평화의 땅인지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수난의 땅 팔레스타인을 통해 평화가 왜 필요하고, 누가 무엇을 위해 종교의 이름으로 평화를 헤치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를 가로지르고 있는 철책선과 팔레스타인의 분리장벽은 이 시대 제국(帝國)의 反평화의 상징이다. 그래서 팔레스타인과 한반도는 평화의 필요성을 알리는 평화의 교사이자, 평화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는 생명의 수원지가 되기도 한다. 나는 팔레스타인에서 마치 팍스로마나(Pax Romana) 아래에서 산상수훈을 통해 선포됐던 평화의 메시지가 팍스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분리장벽을 뚫고 한국의 청년들과 교회들을 평화의 일꾼으로 다시 부르고 있는 환상을 본다. 지난해 교회개혁 500주년이었다. 일신우일신하는 교회개혁이 멈춘 한국사회에서 단지 루터와 독일교회로 우리의 시선과 발걸음을 향하는 것은 너무 한가한 일이다. 한국교회의 시선이 예수와 팔레스타인으로 돌려질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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