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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팔레스타인 이슈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역사 요약 A brief history of the Israeli-Palestinian conflict

by yunheePathos 2014. 9. 1.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역사 요약

A brief history of the Israeli-Palestinian conflict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1896년 작 유대인국가에서 정치적 시오니즘에 이데올로기 기초를 제공했으며 다음과 같이 썼다: 유대인들이 민족을 구성하지만, 민족 문화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영토(국가)가 없다. 유럽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반유대주의로 인하여 헤르츨과 많은 유대인들의 소원은 자신들만의 국가를 갖는 것이었다. (그렇지만)그의 책에는 팔레스타인이 언급되지 없었다.









1897년에 (스위스) 바젤에서 개최된 제1차 시오니스트 의회에 의하면: 시오니즘의 목적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거주를 합법화 하는 것이었다. (이때) 전세계 시오니스트협회는 시오니즘운동의 중심적 의사결정기구로서 수립되었다.


팔레스타인은 400년 동안 오토만제국의 일부였다. 1차 세계대전 후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위임 통치하게 되었다(국제연맹이 영국에게 팔레스타인과 다른 중동국가들에 대한 위임 통치권을 부여했는데, 이것은 각국이 독립 준비가 될 때까지 한시적인 것이었다.) 시오니스트들은 영국의 정책 결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행사하여 1917년에 영국의 외무장관인 아서 벨푸어(Arthur Balfour)가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국가를 세우는 것을 지지한다고 선포하게 하였다.


1, 2차 세계대전 사이에 팔레스타인으로 유대인들의 대거 이주가 이루어졌다. 이미 18세기말부터 유대인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새로운 현상은 아니었지만, 이때의 이주민 수는 막대했다.


몇 차례의 심각한 물리적 충돌 후, 1937년에는 영국 위임 통치의 종결과 팔레스타인을 아랍과 유대인의 국가로 양분하도록 하는 제안이 있었다.


1947년에 유엔은 팔레스타인의 분할을 제안했다. 유대인들은 당시 5퍼센트의 소유권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56.5퍼센트의 영토를 갖게 되었다. 유대 사회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으나 팔레스타인은 거부했다.


                                           UN Partition Plan


1948514, 이스라엘이 수립되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 상황이 가져올 영향 때문에 이것을 나크바”(아랍어로 재앙)로 간주했다. 바로 그 다음날 이스라엘은 이집트,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그 당시는 트랜스요르단) 그리고 이라크로부터 침공당했다. 그러나 이 전쟁이 끝날 무렵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영토의 78퍼센트를 점령했다.

 

이스라엘 국가를 수립한 결과는 75만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주민이 난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여러 이유로 그들의 영토를 떠났는데, 전쟁으로부터의 도피라는 지극히 평범한 이유부터 구조적인 추방까지 다양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이것은 유엔 결의안 194’에 난민들은 돌아갈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명시된 것이나 국제법과는 상반된 상황이었다. 16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만이 이스라엘에 남을 수 있었다. 정확한 숫자는 불확실하지만 이스라엘의 영토가 된 지역에서 대략 400개에서 530개의 마을들이 파괴되었다. 현재는 약 460만 명의 난민들이 웨스트뱅크, 가자, 시리아, 그리고 레바논의 난민캠프에 거주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난민과 내부적으로 추방된 사람들은 총 7백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1967, 이스라엘과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의 6일 전쟁 후 이스라엘은 웨스트뱅크(동예루살렘 포함)와 가자(골란 평원 및 시나이 반도 포함)를 점령했다(1979년 평화협정 후 시나이는 되돌려 줌). 골란 평원과, 웨스트뱅크(동예루살렘 포함) 그리고 가자는 여전히 점령 상태이다.

 

아랍어로 인티파다란 봉기/거부하다라는 의미로서 1987-91년 사이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점령에 항거하는 시위로 시작되어 이스라엘로 하여금 독자적인 팔레스타인 국가를 인정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진행된, 광범위하고 잘 조율된 프로그램을 가리킨다. 인티파다 기간에 민간인들은 세금을 거부하는 등의 불복종 운동으로 이스라엘의 점령이 재정적 부담이 되도록 만들었다. 시위와 투석전도 벌어졌다. 결국 인티파다는 중무장된 이스라엘군에 의해 37천명 이상의 부상자들과 약 750명의 사망자를 낸 후 중단되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평화를 위한 많은 시도가 있었다. 그 중 중요한 것으로 오슬로 (잠정) 합의가 있었다. 합의안은 웨스트뱅크를 A, B, C 구역으로 나누되, A구역(3%)(신생)팔레스타인에 전권을 주고, B구역(24%)은 공동 통치로, C구역(74%)은 이스라엘이 전권(구역별 비율은 그 이후 조금씩 변경됨)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오슬로 안은 궁극적인 평화 협정으로 가기 위한 잠정 합의안이었다. 합의안의 진행 과정은 팔레스타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은연중에 포함하고 있었으나 오슬로 합의는 계속 지연되다가 결국 2001년에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합의안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웨스트뱅크 지역의 대부분을 통치하도록 하는 기반을 만들어 줬다. 예를 들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C구역에 어떤 건물을 짓고자 할 경우에 이스라엘 정부에 허가를 구해야 하며 대부분의 경우는 거부당한다.

 

그림 남헤브론 C 지역의 팔레스타인 마을

 

2000년부터 시작된 두 번째 인티파다 운동은 점점 더 가혹해지는 이스라엘의 점령에 대한 대항과 오슬로 합의안의 실패로 인해 촉발됐다. 외부 협상 세력의 무능력 또는 의지 부족으로 인해 (이스라엘) 정착지는 끊임없이 확장되었고, 게다가 늘어나는 이스라엘 군의 검문소들과 토지몰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미래가 없다고 느끼게 하였다. 두 번째 인티파다 운동은 첫 번째보다 더 무장된 성격이었다. 팔레스타인 측 이슬람 세력은 자살폭탄 공격을 강화하였고, 이스라엘 군대는 이전보다 더 치명적이고 매우 기계화되었다. 3년 간 2,400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780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망했다.

 

지난 100년 동안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에게 지속적으로 영토를 빼앗겨 왔다. 이제 중요한 질문은 과연 앞으로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이다.


참고자료 

William L. Cleveland and Martin Bunton 2009,

- Cleveland and Bunton 2009

- Naim Stifan Ateek 2008

 

번역 : 한국YMCA 생명평화센터

번역 자원봉사 : 박상아(직장인) 

팔레스타인 JAI 자료(2009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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