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나누고 싶어 김경남 목사님이 톡으로 전해주신 것을 옮겼습니다.)
어제(2019년 3월 21일) 고 허병섭 목사의 7주기였다.
그는 1970년대 후반부터 서울시 하월곡동 빈민촌에 "동월교회"라는 빈민교회를 설립하여 판자촌 빈민들을 위해 헌신하여 '하월곡동의 예수'로 불리웠고 이동철(본명; 이철용)의 소설 '꼬방동네 사람들'의 주인공이기도 한분으로, 당시 빈민선교단체인 "수도권 특수지역 선교 위원회"(위원장; 고 박형규 목사) 3대 총무를 역임하였다.
목사였던 그는 목사직을 내려 놓고 동월동 빈민들과 함께 건설일용노동자가 되어 그들의 자활을 모색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는 서울을 떠나 전북 무주군으로 귀농을 하였다. '하월곡동의 예수'에서 '무주의 예수'로 변신한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대안학교를 준비하고 있는 정기준, 이무흔, 한진희, 김창수 등 젊은 교사들을 만나 그들의 참교육과 대안학교에 대한 참뜻을 듣고 그들과 함께 '대안학교 무주 푸른 꿈 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이날 '무주 푸른 꿈 고등학교'
( 이하 '푸고')에서 개최된 그의 7주기 추모집회에서는 평소에 그를 존경하여 그와 같이 살려고 애쓰고 있는 전병생 목사(익산 단비교회 시무)의 추모의 말씀, 이무흔 선생(' 푸고' 교무부장)의 대표기도에 이어, 정기준 선생( '푸고' 교장)과 박상희 목사('한국신학대학' 후배), 정희정 씨(마을 주민)의 회고담 등으로 2시간여 진행되었다.
이날 그가 그리워 그의 추모집회에 참석한
50여명의 귀농•귀촌 주민, '푸고' 교직원들은,
" 예수를 닮은 사람",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한 사람",
" 자연을 닮은 사람",
고 허병섭 목사를 닮은 사람들이 되리라 다짐했다.
어제(2019년 3월 21일) 고 허병섭 목사의 7주기였다.
그는 1970년대 후반부터 서울시 하월곡동 빈민촌에 "동월교회"라는 빈민교회를 설립하여 판자촌 빈민들을 위해 헌신하여 '하월곡동의 예수'로 불리웠고 이동철(본명; 이철용)의 소설 '꼬방동네 사람들'의 주인공이기도 한분으로, 당시 빈민선교단체인 "수도권 특수지역 선교 위원회"(위원장; 고 박형규 목사) 3대 총무를 역임하였다.
목사였던 그는 목사직을 내려 놓고 동월동 빈민들과 함께 건설일용노동자가 되어 그들의 자활을 모색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는 서울을 떠나 전북 무주군으로 귀농을 하였다. '하월곡동의 예수'에서 '무주의 예수'로 변신한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대안학교를 준비하고 있는 정기준, 이무흔, 한진희, 김창수 등 젊은 교사들을 만나 그들의 참교육과 대안학교에 대한 참뜻을 듣고 그들과 함께 '대안학교 무주 푸른 꿈 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이날 '무주 푸른 꿈 고등학교'
( 이하 '푸고')에서 개최된 그의 7주기 추모집회에서는 평소에 그를 존경하여 그와 같이 살려고 애쓰고 있는 전병생 목사(익산 단비교회 시무)의 추모의 말씀, 이무흔 선생(' 푸고' 교무부장)의 대표기도에 이어, 정기준 선생( '푸고' 교장)과 박상희 목사('한국신학대학' 후배), 정희정 씨(마을 주민)의 회고담 등으로 2시간여 진행되었다.
이날 그가 그리워 그의 추모집회에 참석한
50여명의 귀농•귀촌 주민, '푸고' 교직원들은,
" 예수를 닮은 사람",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한 사람",
" 자연을 닮은 사람",
고 허병섭 목사를 닮은 사람들이 되리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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