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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성지순례, 대안, 평화여행

가자지구(Gaza Strip)는 일제하 북간도와 같은 곳이다. - 한국 시민사회 평화의 철학은 무엇인가? 강도만난 이웃을 살피는 강도당한 약자의 평화.

by yunheePathos 2019. 3. 31.
<가자지구(Gaza Strip)는 일제하 북간도와 같은 곳이다. - 한국 시민사회 평화의 철학은 무엇인가? 강도만난 이웃을 살피는 강도당한 약자의 평화>

가자지구의 위대한 귀환행진 1주년에 팔레스타인에서
2019.3.30.

일제의 총칼에 몸뚱아리 하나로 버텨야 했던 곳. 고향 땅 살림살이 모든 것을 정리하고 집도 절도 없이 황폐하기만 했던 남의 땅에서 견뎌야 했던 곳.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의 의지를 꺽지않고 이 땅을 지킬 청년 독립운동가를 키워야했던 곳. 일제 식민지 하 한반도가 팔레스타인의 서안이라면 가자지구(Gaza Strip)는 일제하 북간도와 같은 곳이다.

52년이 되도록 갈라지고 12년이 되도록 하늘과 바다와 땅과 지하조차 완전히 봉쇄된 곳. 하늘 아래 최대의 감옥, 세계 최고의 인구밀도를 자랑하는 길이 42km, 폭 12km의 땅에 2백만이 넘는 이곳. Gaza Strip.

직업은 고사하고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전기와 의료 조차 봉쇄된 곳. 한국전쟁 당시 기독교국가라고 생각했던 미국의 폭격을 피해 교회당으로 피했다가 떼죽음을 당했던 북한 주민들처럼 폭격을 피해 UN 건물로 피했다가 죽음을 당해야 했던 가자의 주민들. 제국 권력하의 어리석은 민중의 땅. 어쩌면 70년 넘게 봉쇄의 사슬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북한과 가자는 이 땅의 민의 평화를 가늠하는 갈릴리일지도 모른다. 정치, 경제, 종교, 문화의 총체적 관점에서.

가자지구에서 1년 동안 지속되고 있는 위대한 귀환행진은 더 이상 희망이 있는 없는 이들의 마지막 피의 절규일지 모른다. 간디의 소금행진과 마틴 루텅 킹의 행진을 평화를 향한 위대한 여정이라고 말한다면, 그들의 행진이 세상의 평화를 만드는데 새로운 영감과 꿈을 주었다고 말한다면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의 생존을 위한 민의 몸부림과 몸으로 말하고 있는 가자지구의 절규를 모른체 외면할 수는 없다. 아시아 3.1 평화혁명의 원류를 자랑하고 있는 한반도 평화운동은 특히나 그렇다.

이것은 단지 강도당한 이웃을 살펴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라 강도당했던 한반도 수난의 역사와 아픔을 헤아리고 아직도 켜켜히 쌓여 있는 우리의 아픔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평화란 무엇일까? 나만의 평화에만 관심하며 타인의 평화에는 무관심한 것을 평화라 쉽게 말하지 않는다. 또한 나의 평화를 위해 타인의 평화를 짓밟아야 한다면 이것 또한 평화라 쉽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 시민사회의 평화의 비전은 무엇일까? 남북한, 한반도만의 평화만을 추구하는 것인가? 동아시아의 평화를 말함도 남북한의 평화를 만들기 위함인가? 아닐 것이다. 남북한의 평화는 제국의 질서를 용인한체 가능할까? 어느 수준에서 가능할까? 그것이 말하는 남북한 한반도의 평화, 동아시아의 평화는 무엇일까?  제국의 질서 하에 민의 평화, 민에 의한 평화가 가능할 것인가? 민의 평화, 민에 의한 평화는 무엇일까? 한국 시민사회의 평화에 대한 비전과 철학은 무엇일까?

그리고 제국의 일선에 한반도와 같이 더욱 열악한 처지로 내몰리고 있는 팔레스타인 이슈는 과연 한반도 평화 정착 과정과 무관할 수 있는가? 골란고원과 예루살렘을 팔아먹는 강도의 심장을 갖고 있는 사람이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을 불러오는 천사의 심장을 가질 수 있을까?

한반도와 팔레스타인은 2차세계대전 이후 제국에 의해 세계 시민사회 싸움판의 선수로 교체 등장하는 강도만난 같은 처지의 억울한 이들이 아닌가? 따라서 한반도의 평화는 시소판의 상대방도, 제국의 또 다른 싸움판의 선수도 함께 살피고 연대하고 협력할 때 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한반도의 평화운동과 비전은 온전하고 따뜻한 약자의 평화일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물론 한반도에 평화를 만들어내기 위한 한국 시민사회의 노력을 전제로 말이다.

이것이 강자에 의한 평화가 아닌 약자들의 평화, 민의 연대와 협력에 의한 평화, 강도 만난 자를 돌보며 만드는 민의 평화 곧 '하느님의 평화'가 아닐까? 나의 평화를 위해, 국제패권질서에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강도만난 자를 외면하고 눈과 귀를 닫는다면 그 평화는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평화인가? 한국 시민사회는 이런 논리에 의해 지배당한 경험이 너무나 많다. 그 결과는 무엇이고 누구를 위한 것인가? 다시 한번 물어야 한다. 이미 강도당한 한반도에서 말이다.

평화의 땅, 팔레스타인에서 드는 생각이다. 한반도 수난의 역사와 죽음, 이별, 고통을 기억하며 지금 이제 제국에 의한 죽임을 멈추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가 이렇게는 더 이상은 안된다고 말하는 세상의 예언자이어야 할까?

평화는 강단의 학문이나 해석놀이로 머물러서는 안되고 몸의 실천이고 행위이어야 한다. 또한 자신의 평화를 위해 타인의 아픔을 강요하거나 그것에 눈을 감아서는 안된다. 한국 시민사회가 강도 만난 이웃에 손을 내밀고 굳건히 연대해가야 하지 않을까? 한반도 3.8선에서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서아시의 평화를 위한 메시지가 강력하게 발산되어야 한다. 이미 강도당한 자신의 현재를 살피는 힘이 필요하다.

한국 시민사회의 평화는 강도만난 이웃을 살피고 연대하는 강도당한 약자의 민의 평화이어야 하지 않을까.

평화의 땅, 팔레스타인에서 '땅의 날' 1주년을 보내며 드는 생각이다. 이스라엘의 분리장벽 총구의 담벼락 밑에서 평화를 말했던 Imam의 담대함이 새롭다.

영상 https://www.facebook.com/1602396103320452/posts/2585294508363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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