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창 3:9)
오늘 모임에 던진 질문입니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속한 집단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했고 하고 있는지,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기를 원합니다.
무엇을 했는지도 모른채
그저 수풀 속에 숨어 눈치보며 있는 것은 아닌지를 보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정한 화두였습니다.
서광선박사님이 이 질문에 성구와 말씀을 주셨습니다.
눈물이 납니다.
가슴에 뜨겁게 흐르며 마음을 촉촉히 적셔오는 눈물을 어쩌지 못하겠습니다.
하와에게 핑계를 구하는 아담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 잘못을 깨닫고 고백할 수 있는 나이기를 원합니다.
박사님의 말씀을 잊지 않기 위해 예배를 마치고 나서 메모해봅니다.
눈을 감고 박사님의 말씀을 마음 깊게 들었습니다.
2015, 10. 16.
YMCA 유지-전문지도자 워크숍 개회예배 설교문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창세기 3:9)
1.
오늘 저희들이 모인 이 자리의 주제를 받아 보고, 놀랐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이 질문은 저에게, 저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한국의 YMCA를 이끌어가는 저희들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들립니다. 요새 말로 하면, 우리 스마트 폰으로 우리 자신의 위치 추적을 해 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느냐? 우리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점검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잘못되었다면, 방향을 수정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잘못된 곳이라면 자리를 옮겨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미래, 앞날, 가는 길을 옳고 바르게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이 질문, 내가 지금 어디 있느냐? Y의 한사람으로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질문하면서 떠오른 말씀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 그리고 고린도전서 4장의 바울 선생님의 편지의 말씀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0~28>
20 그 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어머니와 함께 예수께 왔는데 그 어머니는 무엇인가를 청할 양으로 엎드려 절을 하였다.
21 예수께서 그 부인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은 "주님의 나라가 서면 저의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하고 부탁하였다.
22 그래서 예수께서 그 형제들에게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마실 수 있읍니다" 하고 대답하자
23 예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도 내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편과 내 왼편 자리에 앉는 특권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다. 그 자리에 앉을 사람들은 내 아버지께서 미리 정해 놓으셨다."
24 이 말을 듣고 있던 다른 열 제자가 그 형제를 보고 화를 냈다.
25 예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놓고 "너희도 알다시피 세상에서는 통치자들이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높은 사람들이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27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28 사실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하셨다.
<고린도전서 4장 10~13절>
10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보가 되었고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어 현명한 사람이 되었읍니다. 우리는 약자이고 여러분은 강자입니다. 여러분은 명예를 누리고 있는데 우리는 멸시만 받습니다.
11 우리는 지금 이 시간에도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으며 집없이 떠돌아 다니고 있읍니다.
12 그리고 손발이 부르트도록 노동을 하고 있읍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욕하는 사람을 축복해 주고 우리가 받는 박해를 참아 내고
13 비방을 받을 때는 좋은 말로 대답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인간의 찌꺼기처럼 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0장에 있는 말씀과 마가복음 10장에 있는 말씀에서 우리가 있어야 할 곳, 우리의 위치를 찾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오늘 봉독한 마태복음 20장의 말씀을 다시 되풀이 하지 않겠습니다. 예수의 두 제자 야고보와 요한 형제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찾아 와서 이제 예수님이 왕이 되면 한 사람은 우의정에, 한 사람은 좌의정에 앉혀 달라는, 요새 말로 로비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참 한심한 부탁을 받고 한 숨을 쉬면서, “너희들은 내가 마실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을 고난에 동참할 수 있느냐?”하며 되물으셨습니다. 두 사람의 대답은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고 계실 때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 배신자 베드로처럼, 물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예수님은 너그럽게, “그럴 수 있겠지만, 너희들 자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할 것이다.”고 예수님 옆자리를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말씀은 이것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형제의 어머니와 예수님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제자들은 화가 났습니다. 권력투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자리싸움 말입니다. “너희 사이에서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10:44~45)” 세상의 통치자로 자처하는 자들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높은 사람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갑질”을 하면서 민중을 권력으로 억압하고 내리 누르고 무시하고 착취한다. 너희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섬기는 리더십, 영어로 Servant Leadership”. 섬기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야 있느냐?” 물으시는 질문에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우리 자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섬기는 자리에 있는가? 아니면, YMCA 공동체 안에서 “갑질”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YMCA가 교회와 사회를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지도하고 지배하려고 하는가? 권력투쟁의 자리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스스로 곰곰이 반성하게 하는 질문입니다.
2.
“아담아,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질문은 우리의 정체성의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가 바로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YMCA는 1855년에 당시의 서구의 크리스챤 청년들이 YMCA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모색하면서 발표한 것이 파리기준입니다. 우리의 ‘크리스챤 정체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파리기준 책정 이후 올해로 160년이 흐르는 동안, 계속 질문해 왔습니다. 1973년의 캠바라에서 1998년 “도전21”에서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YMCA의 역사는 크리스챤 정체성에 대한 질문의 역사로 이어져 왔습니다.
우리 한국YMCA의 목적문을 다시 거론할까 하다가, 바울 선생님이 그 옛날, 고린도 교회의 분열과 당파싸움과 교회 권력 투쟁에 대해서 염려하고 분노하면서 쓰신 편지를 읽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의 말씀입니다. 이 편지를 읽고 있노라면, 바울 선생님의 격한 심정, 고린도교회에 대한 분노를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보가 되었고,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어 현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자이고(을), 여러분은 강자(갑)입니다. 여러분은 명예를 누리고 있는데 우리는 멸시를 받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간에도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으며 집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인간의 찌꺼기처럼 살고 있습니다.”고 바울 선생님은 쓰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 YMCA는 바울 선생님 편입니까? 아니면 그 반대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바보가 되었습니까? 아니면 고린도교회 사람들처럼 현명한 사람들, 머리 좋은 사람들, 정치를 잘 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우리는 약자이고 을입니까? 아니면, 100년의 역사를 가진 강자, 갑들이고 가슴에 YMCA 뱃지를 달고 당당하게 다니는 명예로운 기독교 시민단체의 일원입니까? 우리는 바울 사도처럼,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으며 집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습니까? 그렇게는 못하지만, 적어도 이런 사람들 편에서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YMCA는 일하고 운동을 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정말 듣기 싫은 소리를 감히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쓰레기이고 찌꺼기처럼 살고 있다”고 자기비하적인 참담한 말씀을 쓰고 계십니다. 우리는 요사이 이 쓰레기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특히 법을 한다는 사람들, 검찰이나 경찰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범죄자들을 말할 때는 이 “쓰레기”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에서는 “쓰레기”라는 말보다 더 무서운 말이 “좌 뿔”, “빨갱이”, “종 북”, “공산주의자”, “변형된 공산주의자” 등입니다.
“아담아, 너 지금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참 무서운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짓고 나무 잎으로 벌거벗은 몸을 어설프게 감추고 숲속에 숨어 있을 때, 던지신 질문입니다. 이제 우리도 숲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무서워서 숨어 있던 숲속에서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 저희들 여기 있습니다.”하고 나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억압당하고 착취당하고 노예 생활을 하는 사람들 편에 있습니다. 편파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정의 편이고, 자유 편이고 평화 편입니다. 독재자를 심판하시고 노예들을 해방하시는 해방의 하나님, 생명을 창조하시고 보전하시고 지키시고 사랑하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은 “인간 쓰레기”들, “인간 찌꺼기들” 편이고 인간쓰레기들을 사랑하십니다. 예수시대에 로마 정부와 유대교 지도자들과 제사장들은 예수와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을 “인간쓰레기”라고 조롱하고 미워했습니다.
오늘 날, 우리는, 나는, 한국의 YMCA는 어디 있느냐? 이 질문에 대답을 모색하고 이 질문을 고민하는 치열한 모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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