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가 SCA의 해체에 대한 기사를 올렸습니다. 페북에 남긴 메모를 옮겨 몇가지 생각을 추가한 글입니다. 이미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SCM이 전개되고 있습니다만 여기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SCM은 KSCF를 중심으로 한 SCA와 관련한 것으로 국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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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기독운동의 소멸은 한국 기독교사회운동이 소멸하는 전조이자 결과일 것입니다. 또한 한국SCM의 퇴조는 90년대 중반 이후의 학생사회의 변화와 에큐메니컬운동의 약화라는 객관적 조건과 분열과 통합을 반복해왔던 KSCF를 중심으로 한 SCM 자체의 역사적 맥락에서 함께 검토되어야할 사안입니다.
따라서 기독청년에 관심하는 신학적, 사상적 숙고와 역사적 맥락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검토 작업없이 지금 현재를 감당하고 있는 학생들만의 문제로 치부하는 것으로는 답을 마련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 교회가 60년대 말 지지부진했던 SCM 해체를 공식 결정한 이후 미국 에큐메니컬운동의 퇴조가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며 함께했음을 기억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미국 교회는 SCM의 해체 과정에 대한 논쟁이라도 했습니다만 한국 교회는 이에 대해 누구도 거의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과거 70~80년대 화려했던(?) 학생기독운동 선배들의 이야기는 존경할만한 영웅담은 될지언정 지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SCM의 측면에서만 보자면 선배들이 감당해야할 현실의 고단함과 책임이 SCM에 대한 사상적, 실천적 게으름에 대한 변명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책임을 지금의 학생들에게 미루거나 손쉽게 과거의 열쇠를 현재의 정답지로 제시돼서는 안될 것입니다. KSCF의 선배회와 이사회의 구성 면면이 90년대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음을 눈여겨봐야할 것입니다.
이것은 한 두사람 개인이나 집단의 문제가 아닌 SCM과 한국교회 전체의 책임일 것입니다. 특별히 한국교계와 선배들이 SCM에 미친 긍정성과 부정성에 대한 토론이 전무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SCM의 성장과정에 한국교계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도 분명하지만 분열과 해체라는 아픔을 초래한 한 원인이 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SCA가 학생 스스로의 결사와 자치에 의해 조직되고 운영되는 단체임이 분명하나 한국교회로부터 학원선교를 위임받은 단체라는 특성에서 나오는 한국교계와 선배들의 역할에 대한 평가도 반드시 다뤄져야할 부분일 것입니다.
이미 SCM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이제 SCM의 의미를 재구성하고 실천주체로서 청년이 제대로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SCM의 책임주체가 누구인지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에큐메니컬 학원선교운동단체로서 SCA가 한국교회로부터 학원선교를 위임받은 단체라는 명목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과거 70~80년대 화려했던(?) 학생기독운동 선배들의 이야기는 존경할만한 영웅담은 될지언정 지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SCM의 측면에서만 보자면 선배들이 감당해야할 현실의 고단함과 책임이 SCM에 대한 사상적, 실천적 게으름에 대한 변명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책임을 지금의 학생들에게 미루거나 손쉽게 과거의 열쇠를 현재의 정답지로 제시돼서는 안될 것입니다. KSCF의 선배회와 이사회의 구성 면면이 90년대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음을 눈여겨봐야할 것입니다.
이것은 한 두사람 개인이나 집단의 문제가 아닌 SCM과 한국교회 전체의 책임일 것입니다. 특별히 한국교계와 선배들이 SCM에 미친 긍정성과 부정성에 대한 토론이 전무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SCM의 성장과정에 한국교계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도 분명하지만 분열과 해체라는 아픔을 초래한 한 원인이 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SCA가 학생 스스로의 결사와 자치에 의해 조직되고 운영되는 단체임이 분명하나 한국교회로부터 학원선교를 위임받은 단체라는 특성에서 나오는 한국교계와 선배들의 역할에 대한 평가도 반드시 다뤄져야할 부분일 것입니다.
이미 SCM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이제 SCM의 의미를 재구성하고 실천주체로서 청년이 제대로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SCM의 책임주체가 누구인지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에큐메니컬 학원선교운동단체로서 SCA가 한국교회로부터 학원선교를 위임받은 단체라는 명목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KSCF가 갖는 상징성에 비해 그 권위와 존중은 약화되고 특정 교단과 신학교 중심의 기구 운영으로 고착화된지 오래입니다(총무가 어느 교단이냐에 따라 각 교단의 참여와 협력이 달라지는 현실). 목회자와 신학생들의 조직이 되었고 그마저도 이들 몇몇 사람들의 헌신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누가 이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요?
한국 개신교가 의미를 상실한 마당에 한국교계 주류집단에서 새로운 학원선교에 대한 비전이 만들어질수 있을까요? 개교회와 대형교회 중심의 그리고 몇몇 성직화된 목회자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한국교계의 현실에서는 헛웃음이 나는 상상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SCM과 기독청년운동은 청년•학생들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한국에큐메니컬운동 전체의 과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담당하고 있는 조직 구성원들에 돌을 던지는 것으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몇몇 선배들에 의해서만 좌우될 문제 수준에서도 이미 벗어난 상태입니다. 그것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SCM의 진로와 향방은 한국 에큐메니컬운동의 생사와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SCM의 주체와 논의 책임주체를 분명히하는 것으로부터 다시 논의를 시작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SCM은 기독학생들의 자발적인 결사체입니다. 따라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KSCF를 중심으로 한 기독청년학생들의 자발적인 책임의식과 실천이 그 무엇보다 앞서야하고 존중되어야 합니다.
또한 한국 기독교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숙의로 기독교의 본류의 바다로 변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개인과 집단에 의해 그 힘만큼 새로운 불씨를 살려갈 것이라는 기대를 갖습니다. 아마도 이런 분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노력이 한국교회에 의해 만들어지는 그 가능성과 현실성보다 크고 높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교단과 개교회에 사로잡힌 성직화된 대형교회 중심의 몰역사화된 한국교회에 대한 변화를 절실히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장의 일손과 동원을 위한 도구가 아닌 에큐메니컬운동의 공동의 미래로서 청년학생들에 대한 책임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은 자조적이고 자구적인 노력과 함께 NCC와 이에 참여한 각 교단 그리고 YMCA, YWCA 등 유관 연합기관들의 포괄적이고 장기적인 협의 틀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물론 지속적인 실천 프로그램들이 모색되어야 하겠지만 당장 한 두개의 실행 프로그램으로 SCM의 향방과 진로가 마련되지 않을 것임은 분명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매락에 대한 성찰과 새로운 SCM을 재구성하는 일, 청년주체를 불러 세우는 일, 이에 필요한 조직과 인력과 재원을 모으는 일, 교회와의 지속적인 협력을 도모하는 일, 그리고 신학교와 기독인 지식인그룹과의 연대와 협력을 일구어내는 일, 새로운 문명에 대한 신학적 탐구와 사상적 세례를 만들어내는 일, 기독학생의 진로탐색과 진출을 준비하고 지지하는 일, 공동의 비전과 사업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일, 지구시민사회의 평화리더십으로 역할하는 일 등등.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교회 주류에서는 이에 대한 희망을 찾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소위 에큐메니컬운동 그룹이 빛을 갖고 있다고 쉽게 응답하기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미 에큐메니컬운동 또한 목회자를 중심으로 교단이나 출신 신학대별, 세대별로 편재되어 있거나 경험의 편차가 심각한 상황으로 이에 대한 공동의 협의를 모아가기 쉽지 않은 실정인 것 같습니다. 소위 에큐메니컬운동의 본체라고 자부하는 NCC의 기독교회관에서 목회자가 아닌 사람이 활동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되었고 이것은 청년학생단체도 크게 다르지 않은 현실입니다.
학생기독운동을 새롭게 모색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더라도 놓아서는 안될 고민인 것 같습니다. 이 과정은 교단과 개교회를 넘어서는 새로운 기독청년학생 리더십을 형성하는 과정이기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에큐메니컬운동과 생활인기독자운동을 복원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작은 힘들을 보며 위안을 찾기보다는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다른 집단의 들보를 크게 보기보단 내 눈 안에 있는 티눈을 크고 심각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SCM에 대한 논의는 협력하지 못하는 한국교계와 에큐메니컬운동의 고질병을 치유해가는 과정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미국의 경험을 반추해보며 이것이 향후 에큐메니컬운동의 향방을 결정하는 일이라면 너무 크게 말하는 것일까요?
새로운 토론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소원해 봅니다.
한국 개신교가 의미를 상실한 마당에 한국교계 주류집단에서 새로운 학원선교에 대한 비전이 만들어질수 있을까요? 개교회와 대형교회 중심의 그리고 몇몇 성직화된 목회자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한국교계의 현실에서는 헛웃음이 나는 상상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SCM과 기독청년운동은 청년•학생들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한국에큐메니컬운동 전체의 과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담당하고 있는 조직 구성원들에 돌을 던지는 것으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몇몇 선배들에 의해서만 좌우될 문제 수준에서도 이미 벗어난 상태입니다. 그것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SCM의 진로와 향방은 한국 에큐메니컬운동의 생사와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SCM의 주체와 논의 책임주체를 분명히하는 것으로부터 다시 논의를 시작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SCM은 기독학생들의 자발적인 결사체입니다. 따라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KSCF를 중심으로 한 기독청년학생들의 자발적인 책임의식과 실천이 그 무엇보다 앞서야하고 존중되어야 합니다.
또한 한국 기독교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숙의로 기독교의 본류의 바다로 변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개인과 집단에 의해 그 힘만큼 새로운 불씨를 살려갈 것이라는 기대를 갖습니다. 아마도 이런 분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노력이 한국교회에 의해 만들어지는 그 가능성과 현실성보다 크고 높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교단과 개교회에 사로잡힌 성직화된 대형교회 중심의 몰역사화된 한국교회에 대한 변화를 절실히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장의 일손과 동원을 위한 도구가 아닌 에큐메니컬운동의 공동의 미래로서 청년학생들에 대한 책임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은 자조적이고 자구적인 노력과 함께 NCC와 이에 참여한 각 교단 그리고 YMCA, YWCA 등 유관 연합기관들의 포괄적이고 장기적인 협의 틀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물론 지속적인 실천 프로그램들이 모색되어야 하겠지만 당장 한 두개의 실행 프로그램으로 SCM의 향방과 진로가 마련되지 않을 것임은 분명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매락에 대한 성찰과 새로운 SCM을 재구성하는 일, 청년주체를 불러 세우는 일, 이에 필요한 조직과 인력과 재원을 모으는 일, 교회와의 지속적인 협력을 도모하는 일, 그리고 신학교와 기독인 지식인그룹과의 연대와 협력을 일구어내는 일, 새로운 문명에 대한 신학적 탐구와 사상적 세례를 만들어내는 일, 기독학생의 진로탐색과 진출을 준비하고 지지하는 일, 공동의 비전과 사업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일, 지구시민사회의 평화리더십으로 역할하는 일 등등.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교회 주류에서는 이에 대한 희망을 찾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소위 에큐메니컬운동 그룹이 빛을 갖고 있다고 쉽게 응답하기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미 에큐메니컬운동 또한 목회자를 중심으로 교단이나 출신 신학대별, 세대별로 편재되어 있거나 경험의 편차가 심각한 상황으로 이에 대한 공동의 협의를 모아가기 쉽지 않은 실정인 것 같습니다. 소위 에큐메니컬운동의 본체라고 자부하는 NCC의 기독교회관에서 목회자가 아닌 사람이 활동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되었고 이것은 청년학생단체도 크게 다르지 않은 현실입니다.
학생기독운동을 새롭게 모색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더라도 놓아서는 안될 고민인 것 같습니다. 이 과정은 교단과 개교회를 넘어서는 새로운 기독청년학생 리더십을 형성하는 과정이기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에큐메니컬운동과 생활인기독자운동을 복원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작은 힘들을 보며 위안을 찾기보다는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다른 집단의 들보를 크게 보기보단 내 눈 안에 있는 티눈을 크고 심각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SCM에 대한 논의는 협력하지 못하는 한국교계와 에큐메니컬운동의 고질병을 치유해가는 과정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미국의 경험을 반추해보며 이것이 향후 에큐메니컬운동의 향방을 결정하는 일이라면 너무 크게 말하는 것일까요?
새로운 토론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소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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