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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

한국 시민사회의 성찰과 토론이 필요하다. 시민사회의 재구축이 필요하다.

by yunheePathos 2016. 10. 26.

걱정이 많은 시절입니다. 민주적 법 질서에 의해 운영되어야 할 공적 영역과 시민사회가 한 사람에 의해 얼마나 쉽게 망가지고 가치와 윤리가 전도될 수 있는지를 배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거꾸로 한국 지식인 사회와 시민사회가 얼마나 뿌리가 없고 약한지, 사회운영 원리에 대한 시민사회 공동의 기반이 부재한지, 시민사회의 현 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기도 한 것 같습니다. 


글로벌한 정보사회에서 언론과 기업의 윤리와 책임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사회가 얼마나 껍데기를 갖고 치장하며 살아가는지 서로 보기가 민망하고 자괴감이 드는 시간인 것 같습니다. 어렵다는 경제, 파산직전의 정치, 희망을 강요당하는 청년사회, 생존과 편안한 삶이 불안한 노년, 학교라는 기계틀에 찍히고 얽눌리는 청소년 뭐 하나 마땅한게 보이지 않고 세계 평화위기의 배꼽이 되어 갈등과 냉전, 전쟁의 주술만이 난무하는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구한말과 같이 한국사회는 국제 정치질서의 고아가 된 것 같습니다.


이것은 1993년 김영삼 정부를 시작으로 1998년 김대중 정부 이후 본격화된 소위 거버넌스라는 이름으로 시민사회의 성장기를 구가하는 듯 보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대로 형성되지도 않았던 시민사회의 운영원리(시민사회론)가 성숙되지 못한채 시민사회의 주요 리더들과 그 일단의 그룹들이 주류의 정부와 정당으로 흡수, 편입되어 시민사회의 약화를 초래했던 결과이기도 하다고 생각됩니다. 어쩌면 정당운동의 토대가 약해 끊임없이 외부로 부터 리더십을 수혈해왔던 연장선상에서 시민자치권력의 마지막 수원지를 대책도 없이 파헤친 업보인지도 모릅니다.


시민들의 자치와 협동, 자율적인 조직과 자치권력을 말하기 이전에 정책과 대안을 말하며 소위 시민단체 활동가와 전문가 중심의 활동을 만들고, 이들에 의해 정당과 정부 그리고 시민사회의 역할과 관계 방식이 혼재되며 공적영역의 권력에 대한 통제와 시민사회의 참여 방식과 기능이 불분명한, 어쩌면 상실된 한국 시민사회의 단면이라고 생각됩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시민사회운동 리더십들의 절차적 민주화에 대한 환상과 70년대, 80년대 민주화세대들의 조급성 그리고 시민사회에 대한 철학의 부재가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양한 평가가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만 총선시민연대가 그 하나의 시작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 시민사회운동은 정책과 대안이라는 이름으로 현안을 쫒아다니기에도 바빠 숨을 헐떡이고 있고, 선거에 대한 정치공학적 대응에 골머리를 집중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하면 잘못일까요? 마치 정책과 대안을 제시하고 사람들의 표를 구하려는 정당이나 된 듯이 분명한 시민사회의 자기 가치를 주장하지 못하는 현실은 모든 사고의 스팩트럼이 정당 프레임에 갇혀 소위 한국 시민사회운동이 주변화되고 부차화되어 있다고 봐도 큰 무리가 아닐 듯 싶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의 진단과 대책을 논하는데 있어서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현실'이고 '현실적인 대책'이고, 내년 선거에 대한 일정을 우려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더구나 이젠 시민단체에서 일하고자 하는 사람조차 만들어내지 못하거나, 최소한의 생존조차 불가능하게 되어 먹고 살기 위해 거버넌스라는 이름으로 여기 저기 문을 두드려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하면 무리한 이야기일까요? 물론 이것이 전부 부정당해야 할 일들이 아니고 리더십의 교류와 공급은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의미있는 동일한 현상이라 하더라도 허약하기 그지없는 시민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원지가 끊긴 시민사회는 결국 한국 사회 발전 동력을 상실한 것으로 봐도 그리 틀리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스스로 리더십을 형성해오지 못한 정당은 말할 것도 없고, 시민사회 역시 새로운 청년 리더십을 형성하기 위한 노력이나 대책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한국 시민사회가 그동안 스스로의 역량과 경험을 토대로 시민사회 운영원리를 말하기 보다는 서구 100여 년의 과정에서 쌓여온 다양한 경험과 그 사회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겪었던 오류들을 생략한채 현장과 유리된 강단에 의해 결과만이, 제도와 시스템으로 말해지고 평가되고 있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또 다른 한짝으로 중앙권력에 대한 변화 가능성을 상실한채 지역과 자치라는 명분으로 일본 사회를 베끼기에 바빴던 지역운동의 현실이라는 양면이 이제는 시민사회의 토대 붕괴와 상관없이 중앙과 지역과 상관없이 정당 정치공간에서 만나는 아주 기막힌 현실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시민사회 운영에 대한 기본 철학도, 존중도 없는 이런 사회에서 누가 바닥에서 기초조직을 만들려할 것이며, 시민들의 생활현장에서 자치권력의 꽃을 피우려 하겠습니까? 정치공간에 의해 만들어진 리더십과 강단의 학자만이 전문가처럼 취급되는 한국사회의 단면이 시민사회운동에도 그대로 관철되고 있는 곳에서 말입니다. 가방끈 늘려 공부하고 정당공간으로 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책이자 현명한 처세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 결국 지금이 아닐까 싶습니다. 권력을 통한 사회제도의 재구조화 만큼이나 더 중요한 것이 자율적인 시민들의 조직과 자치와 참여일 것입니다. 권력 획득을 위해 동원되는 수사로서 참여와는 다른 일상적인 참여와 자치의 공간과 네트워크로 만들어지는 작은 사회의 연결말입니다. 생태운동조차 선거 시간표에 쫒겨 만들어지거나 정치적 선택으로 강요되는 한국사회에서는 쉽지 않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과거와 같이 정당을 통한 권력지배 구조의 변화만으로는 사회가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책과 제도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만들어가는 현실적인 힘으로써 정당운동의 중요성을 평가해야 하지만 정당운동이라는 배가 떠 있을 수 있는 깊은 바다의 흐름을 만들어 내는 일이 더 크고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배는 언제든 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시민사회입니다. 한국 사회 정당운동은 지금까지 스스로의 바다를 만들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 수원지를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한채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제도적인 물리적인 힘으로서 시민사회를 활용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이제 다양한 영역에서 90년대 중반의 논의에서 머물고 있는 시민사회론을 재구축하기 위한 깊은 성찰과 토론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습니다. 이제 현장의 철학이 꽃피고 배고픔을 달랠 수 있어야 합니다. 존중받는 곳이 되어야합니다. 공급자 중심의 관점에서 모든 것이 평가되는 것으로부터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의 연대와 협력의 관점에서 생각이 나눠져야 합니다. 또한 횡행하고 이는 서국 제국의 기부와 모금의 관점이 바뀌어야 합니다. 강자의 나눔과 약자의 나눔은 분명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자본의 논리와 강자의 질서로 재단하거나 평가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서구에서 공부하고 오는 것이 정말 큰 문제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서구 제국의 경제적, 정치적 역사성과 배경은 생략된채 서구 제국의 질서와 요구, 관점을 마치 보편적인 윤리이자 기준처럼 한국 시민사회의 이름으로 이야기하거나 힘으로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YMCA는 시민사회의 토대 구축(시민사회 형성)과 리더십(특히 청년 리더십)을 육성하는데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 안에서 만들어진 리더십들이 정치조직을 만들고 사회 저변의 작은 조직들을 만들어가는 힘으로 작동하며 역할을 해왔습니다. 현안에 대한 긴장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에 급급해 하기보다 국내외의 거시적인 관점을 상실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는 통로를 잃지 않으려 노력했고, 그들을 자치권력의 리더십으로 키우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회원과 현장, 시민공간을 소중히 생각하는 조직이기도 합니다. 이로 인해 YMCA 내부에서는 다양한 견해와 방식이 충돌하기도 하면서도 대화와 존중, 그리고 정신적 일치성의 상실을 유지하기 위해 민감한 정치적 현안은 별도의 조직과 방식으로 작동해왔던 것도 하나의 시대적 전통이기도 하였습니다. YMCA의 지역은 행정단위의 지역이 아닌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으로서의 지역이기도 합니다. 이로 인해 87년 민주화 이후 현안 대응이 느리다는 비판도 있었고, 모든 영역에 걸쳐 안하는 것이 없다는 지적도 받아온 것이 사실입니다. YMCA가 시대적 상황에 조응하며 자기 조직의 운영원리와 활동방식을 잘 정리해오지 못한 것도 분명히 가장 큰 원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YMCA의 작동원리와 운동방식에 대한 이해 부족이 초래한, 소위 현장과 유리된 강단의 오해에서 비롯된 지적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YMCA가 전통을 수렴하면서도 좀 더 열리는 공간에서의 역할 찾기에 충분히 성공하지 못했고, 또한 이런 오해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영역에서의 충분한 노력이 부족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YMCA는 지금 한국 시민사회의 현실에 대한 책임의식을 누구보다 크게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현안에 대한 대응을 해가면서도 장기적인 자기 비전과 흐름에 대한 대안없이 급급히 쫒아가기 보다는 시민사회 재구축에 대한 깊은 성찰과 토론이 만들어지는 수원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치권력이 허약한 시민사회의 토대에서 제2의 박근혜 이명박은 보수와 진보 어디에도 가능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금 목도되고 있듯 한국 사회 운영의 토대이자 뿌리라 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허약성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YMCA에게 요구되는 가장 큰 역할은 YMCA를 위해서도, 터전없이 흔들리며 수원지가 끊긴 한국 시민사회를 위해서도, 시대 담론과 정치질서의 변화를 위해서도 시민사회 재구축을 위한 성찰과 대책을 수립해가기 위한 노력일 것입니다. 


글로벌한 경제사회에서 소위 제 3섹터론에 아직도 머물고 있는 한국 시민사회론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이기도 합니다. 시민사회는 결국 볼런티어의 참여로 다양한 영역에서의 자치권력를 형성함으로써 상호부조와 변화를 만들어 냄으로써 새로운 삶의 관계방식(가치와 문화)과 사회질서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업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끊임없이 시민들이 살아 움직이고 학습하며 스스로의 자치 공간을 확대해가는 공간, 다양한 영역에서 개인과 그룹으로서 연결되고 협력되는 중층적 네트워크, 새로운 리더십의 육성과 공급, 기업과 정당 그리고 자치정부와 중앙정부와의 관계와 작동 방식존중되는 시민사회운동을 위해서 말입니다.  

드러난 현실에 대한 법적, 정치적 책임을 묻기 위한 시민사회의 노력을 분명히 하되 시민사회운동의 성찰을 기초로 한 시민사회 재구축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망가진 지식인 사회, 기능 상실의 언론, 글로벌 기업이라는 뒷면의 무책임과 비윤리 등 모든 영역에서 이와 같은 토론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기폭제가 되고 접착제가 되어 새로운 시민사회운동의 용광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녀 사냥만으로는 결코 사회를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문제가 결국 이런 것을 제대로 만들어오지 못한 시민사회운동의 결과이자 시민사회운동한답시고 살아온 사람의 몫도 크다 생각하다보니 주절이 주절이 넋두리가 되었습니다. 하여튼 상식과 공동의 윤리조차 부정되는 현 정부여당에 의해 무슨 일이 만들어질지 걱정이 많은 시절입니다.


- 시민사회? 국제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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