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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도 분주했지만 미안함만이 그득한 날.. 오늘. 이젠 어제이네요. 어제 목요일에는 오랜만에 서울을 다녀왔습니다. 1년에 한번 개최되는 기후변화룰 주제로 한 '기독교 환경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동안 몇달 동안 만남을 미뤄왔던 분들과의 인사를 위한 핑계이기도 했습니다. 말처럼 이 회의는 핑계가 되어 오전만 참여하고 오후 내내 여러 선후배들을 만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참석하고자했던 모임은 마지막도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시간들이었습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던지는 이런 저런 질문들에 쉬이 답을 할 수가 없는 처지였습니다. 모임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만나는 분들에게도 충실하지 못한 시간이었습니다. 죄송하기만 합니다. 그렇게 또 하루를 죄송스럽고 감사한 마음으로 보냅니다. #숨 #기독교환경회의 2018. 12. 7.
연표로 보는 서울YMCA 약사 (1) 태동기의 몸짓 : 창설기의 YMCA(1895~1914) 한국YMCA의 창설은 선각적 지사들과 청년들의 자발적인 노력에 의해 그 기초가 마련되었다. 서재필, 윤치호 등이 중심이 된 독립협회운동과 1899년 한국청년 150명의 기독교청년회(YMCA) 설립청원운동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한국YMCA는 1901년 최초의 학생YMCA로 배재학당 학생Y가 조직되고, 1903년 최초의 시청년회(City YMCA)로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창립되면서 역사의 표면에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후, 한국YMCA는 이상재, 윤치호, 김정식, 남궁억 등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운동의 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하고, 상동교회의 진덕기를 비롯한 평민출신의 청년 애국지사들이 가담하면서 교육 계몽, 선교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또한 .. 2018. 12. 5.
서울YMCA 약사 - 민족독립운동에서 시민운동까지 서울YMCA 약사 - 민족독립운동에서 시민운동까지 서울기독교청년회는 구한말 열강의 침탈야욕으로 인해 겨레의 앞날을 가늠하기 어렵던 참으로 어둡던 시기에 민족의 자주와 개화를 갈망하던 청년들의 열정이 거름이 되어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라는 이름으로 창립되었다. 쇄국으로 국제정세에 어둡고 정쟁으로 민중의 삶이 외면되어 쇠잔하는 국운에 이 겨레가 소망을 잃어갈 즈음, 교육․계몽․선교의 기치로 YMCA가 개화구국운동에 새 지평을 열게 된 것은 민족사는 물론 교회사적으로도 크레 자리매김된 은혜스러운 사건이었다.창립 이듬해인 1904년 여름에는 일단의 개화청년운동 지도력들이 활성기독교청년회에 합류하면서 서울YMCA는 민족YMCA로서의 면모를 갖추게되었다. 옥살이에서 풀려나온 독립협회계 인사들 즉 이상재, 홍.. 2018. 12. 5.
한국YMCA 약사 - 민족독립운동에서 지구시민사회 생명평화운동으로 민족독립운동에서 지구시민사회 생명평화운동으로 1. 자주와 개화의 상징, 한국YMCA운동의 탄생 한국YMCA는 구한말 열강의 침탈야욕으로 인해 겨레의 앞날을 가늠하기 어렵던 참으로 어둡던 시기에 민족의 자주와 개화를 갈망하던 청년들의 열정이 거름이 되어 탄생되었다. 1901년 배재학당YMCA를 시작으로 1903년 10월, “황성기독교청년회”, 1914년 4월,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를 창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쇄국으로 국제정세에 어둡고 정쟁으로 민중의 삶이 외면되어 쇠잔하는 국운에 이 겨레가 소망을 잃어갈 즈음, 교육․계몽․선교의 기치로 YMCA가 개화구국운동에 새 지평을 열게 된 것은 민족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2. 근대 개화청년들의 구심, 청년들에 의해 시작되다. 한국YMCA운동은 .. 2018. 12. 5.
서울YMCA 운동연구 (1994 ~ 2003) 서울YMCA 운동연구(1994 ~ 2003) 제12회사업연구회 “국제화시대에 있어서 민간단체의 역할과 기능” 14 국제화시대의 환경운동 ----------------------------- 24 국제화시대의 소비자운동 --------------------------- 32 국제화시대의 청소년운동 --------------------------- 41 국제화시대의 사회체육운동 ------------------------- 59 제13회사업연구회 “한국교회와 YMCA운동” 한국 기독교와 민족사 ------------------------------ 94 기독교 사회운동으로서의 YMCA운동 -----------------119 교회와 YMCA운동의 연대성 모색 --------------------127 제14.. 2018. 12. 5.
일제하 YMCA 사중목적사업과 교육 1904년 윤치호, 이상재, 김정식, 김규식, 최병헌 등 지도자들이 청년회에 적극 참여하면서 교육․계몽․선교의 지도노선은 함축성이 풍요해지고 외국인 지도자와 한인지도자 사이에는 자칫 하느님 나라 운동을 둘러싼 긴장관계가 조성되는 활기를 보였다. 더욱이 1907년의 소용돌이 속에서 YMCA 중진들(알렌, 전덕기, 헐버트)의 정치적 관여로 인하여, 갓 출범한 ‘황성호’는 위기를 맞이하는 듯이 보이기도 하였다.‘사중목적사업-정신적, 지적, 사교적, 신체적 spiritual, mental, social, physical’의 출현은 한국사회의 충격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족하였다. 황성기독교청년회는 당시 ‘사중목적사업'을 효과적으로 실시할 수 있다고 여겨진 구식 부서화 제도를 채택하여 종교부, 교육부, 체육부.. 2018. 12. 5.
3.1운동과 YMCA ◆ 3.1운동 : 민족대표 33인중 YMCA 관계자 9명 ․YMCA직원(5명) - 오화영, 박희도, 이필수, 양진백, 이승훈 ․YMCA이사(2명) - 정춘수, 최성모 ․YMCA회원(2명) - 이갑성, 박동완 우리는 3.1운동 모사과정에서나 운동진행에서 YMCA 총무였던 윤치호나 또 이상재의 주도역할 불투명이란 사실을 목도하게 된다. 그것은 윤치호 자신의 개인적인 판단의 문제도 있겠지만, 3.1운동이 어떤 국내조직기관의 공적개입이란 차원에서 수행될 수 없었다는 객관적 사실을 시인하여야한다. 기독교회나 천도교나 어느 하나에서도 그 거국적 조직의 공식 대표성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은 공개 결의과정이란 노출이 운동전체의 비밀 진행을 당초에 파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YMCA 역시 어떤 인사가 참.. 2018. 12. 5.
2.8독립선언운동과 YMCA 2.8독립선언운동의 국내전입 경로3.1운동이 동경의 한국YMCA에서 진행된 독립선언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일제 정보통의 분석이었다. 그런데 그 선언서를 국내에 반입하고 국내 독립운동의 기운 조성, 아니면 그 기운과의 합류를 가능하게 한 연락을 수행한 이들이 대개 송계백(宋繼白), 최근우(崔謹遇), 서춘(徐椿, 1894-1943) 및 김마리아(1891-1944)였는데 이들이 다 기독교인들이었고, 그리고 송계백은 청년학관을 졸업한 인사였다. 그가 독립운동의 국내모사 주동인 최인(崔麟), 송진우(宋鎭禹), 최남선(崔南善), 현상윤(玄相允)과 만나 동경 상황을 제보함으로써 일대 거사의 시운을 합류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최남선이 나서서 기독교의 이승훈(李昇薰, 1864-1930)과 교섭.. 2018. 12. 5.
농촌 운동체로서의 YMCA ◆ 농촌 운동체로서의 YMCA1925년부터 시작된 농촌운동은 피폐한 농촌을 개발하고 복음을 전파하여 농민의식개혁과 농업발전에 대단한 영향을 미쳤다.․강령 : “우리는 농민의 경제적 향상, 사회적 결단, 정신적 소생을 도모한다.”․사업 - 야학과 주학개최 - 아동, 성인 교육 추진․농민강습소: 전국에 60여개 7,200명 학생 수용 (1926-1934). “정신적 발전소”라 칭함․협동조합운동 전개(1929년 서울기준) - 협동조합 : 11개 - 소비조합 : 5개 - 판매조합 : 11개 * 자료 출처 및 각주 등의 세부 정보는 첨부자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와이.엠.씨.에이의 농촌운동과 협동조합운동 1920년대 민족 개량주의 농촌운동이 한창일 때 농촌계몽운동, 농사기술보급운동 특히 협동조합운동을 활발히 전.. 2018. 12. 5.
YMCA 인물 53. 2.8 독립선언문 서명자 송계백 선생 2.8 독립선언문 서명자송계백 선생 -거족적인 독립운동 위해 국내외 밀사로 활약 1919년에 일어난 2.8독립선언의 주동인물인 송계백 선생은 1895년에 평안남도 영유(永柔)에서 태어났다. 송 선생이 YMCA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중학교를 졸업한 후 영어실력을 더 기르기 위해 3년제 중학영어와 주학부인 Y 학관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1914년에 보성중학교를 제 5회로 졸업하고 그는 3년 후에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민족적인 거사 2.8 독립운동에 가담케 됐다.또한 1915년 4월에 광주에서 열린 제 5회 학생수련회에 Y학관 학생대표로 다른 두사람과 함께 참석하기도 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가 일본에 건너가서는 재일본 한국YMCA의 당시 총무이던 백남훈(白南薰) 선생을 비롯해.. 2018. 12.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