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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MCA 인물 43. 현대 건축사의 선봉자 이명원 선생 현대 건축사의 선봉자이명원 선생 -이 선생은 젊은 간사로서 일제의 경제적․폭력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열성 회원들과 함께 YMCA를 사수하는데 성공했다 내가 직접 만나본 Y원로회원 중에서 가장 나이가 높으신 회원이었다. 선생은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약 10개월 전인 1884년 2월 25일 서울에서 이경윤(李慶允)씨의 맏아들로 출생했다. 일찍이 개화되어 1906년에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를 졸업하고 1907년부터는 궁내부(宮內府) 주사를 지냈다. 그러나 월남 이상재 선생의 권유로 YMCA학원 영어과에 입학하여 1911년에 제 3회로 졸업, 이어 그 간사가 되었다. 선생이 간사로 있을 때의 일인데, 1913년 당시 부총무로 있던 김 인(金 麟)이 일본 총독부의 사촉을 받아 YMCA를 파괴하려 할 때, Y 이사.. 2018. 12. 4.
YMCA 인물 42. 광복시인이며 영문학자인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선생 광복시인이며 영문학자인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선생 3.1운동 때에는 YMCA 학관에서 배운 영어로 독립선언서를 번역하여 구미 각국에 알리기도…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선생은 1898년 5월 9일 서울 맹현(孟峴, 종로구 가회동)에서 변정상(卞鼎相) 씨와 진주 강(晋州 姜)씨 사이의 3남으로 출생했다. 호는 수주로 광복시인이며 수필가, 영문학자, 언론인, 한학자이기도하다. 그의 가족으로는 법률가인 삼청(三淸) 변영만(卞榮晩) 씨가 그의 맏형이며, 자유당 정권 때 외무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낸바 있는 일석(逸石) 변영태(卞榮泰) 씨가 그의 가운데형이다.그는 1907년에 사립중앙학교(中央高普 전신)를 다니다가, 1910년에 사립 계산학교(桂山學校)와, 1912년에 YMCA청년회 학관 영어과를 졸업했고.. 2018. 12. 4.
YMCA 인물 41. Y일요강화와 하령회를 통해 청년들에게 애국심을 불러일으킨 교육자 김창제(金昶濟) 선생 Y일요강화와 하령회를 통해 청년들에게 애국심을 불러일으킨 교육자김창제(金昶濟) 선생 Y창설시부터 학생회원으로 활동교육자이면서 웅변가로도 유명했던 김창제(金昶濟) 선생은 1877년에 충청남도 보령군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신문학에 뜻을 품은 선생은 일찍이 상경하여 관립한성사범학교(경기고등학교의 전신)를 졸업했으며 1903년에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창설될 때부터 학생회원으로 활동을 했다.이미 기독교 신자이기도 했던 선생은 한국YMCA 창설과 함께 회원으로 출발하여 전 생애를 Y운동의 지도자로 마쳤다고도 할 수 있다. 안동장로교회를 개척또한 선생은 안동교회의 창설자 중의 일원이기도 했다. 당시 장로교회는 장안에다 교회를 세울 때 지역적인 면에 많은 고려를 해서 세웠다. 즉 서대문 쪽에는 새문안교회.. 2018. 12. 4.
YMCA 인물 40. 전쟁고아와 부녀자 구호사업에 힘쓴 창주(滄柱) 현동완(玄東完) 선생 전쟁고아와 부녀자 구호사업에 힘쓴창주(滄柱) 현동완(玄東完) 선생 현동완(玄東完) 선생은 1899년 6월 12일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호는 창주(滄柱)로서 그는 1917년 조선중앙YMCA 학관을 졸업한 뒤, 1918년부터 YMCA 간사로 피택되어 소년부와 체육부 간사, YMCA 연맹 주임간사, 영창학교(英彰․Y학관) 교장, 그리고 서울YMCA 총무를 지내는 등 거의 전 생애를 YMCA와 더불어 산 Y멘이다.그의 가문은 YMCA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큰아버지인 현흥택(玄興澤) 씨는 구한말엔 군인으로서 전권대사 민영익(閔泳翊) 씨의 수행원으로 미국과 구라파 여행을 했으며, 1896년에 독립협회가 조직될 때에는 정령(正領)의 신분으로 창설에 많은 활약을 했다. 특히 1903년에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창.. 2018. 12. 4.
YMCA 인물 39. 창의력과 실천력을 겸비한 자원지도자 설봉 전택보 선생 창의력과 실천력을 겸비한 자원지도자설봉 전택보 선생 1901년 11월 1일에 함경남도 문천국 교월리(橋越里)에서 탄생한 전택보 선생은 14세 때에 부모를 따라 북간도로 이주하였다. 부모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므로 교회학교에 다니면서 민족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에는 독립신문을 인쇄하여 동지들과 신문을 뿌리고 만세를 부르다가 죽을뻔 했으나 이듬해 일본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나면서부터 가난하게 태어난 그는 고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신문팔이, 인력거도 끌면서 열심히 공부를 했다. 처음에는 철학이나 인문 계통의 학문을 하려했으나 도중에 마음의 변화를 입어 상과를 택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924년인 24세 때에 고베(神戶) 고상(高商)에 입학, 4년 간의 수업을 우수한 성적으로.. 2018. 12. 4.
YMCA 인물 38. 좌익세력에 대항하여 재일본 한국YMCA를 지켜온 김옥남(金玉南) 선생 좌익세력에 대항하여 재일본 한국YMCA를 지켜온김옥남(金玉南) 선생 한나라의 역사에 흥성한 때와 침체한 때가 있는 것처럼 한 단체의 역사도 흥성기와 침체기가 있기 마련이다. 재일본 한국YMCA의 과거 70여년 간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몇 차례의 흥성했던 시대를 회상하며 긍지와 명예를 느끼게 된다. 김정식, 백남훈, 최승만, 김우현 총무 당시에 흥성기 이뤄1906년, 재일본 한국YMCA는 당시 황성기독교청년회의 부총무로 있던 김정식(金貞植)씨가 일본으로 파송됨으로써 창설되었다. 창설과 함께 총무에는 김정식씨, 이사에는 조만식(曺晩植)씨 등이 되었으며 그 두 사람이 창설기의 꽃을 피웠는데 이때가 최초의 흥성기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백남훈(白南薰) 총무 당시라고 할 수 있다. 재일본 유학생의 2.8독.. 2018. 12. 4.
YMCA 인물 37. 세계 YMCA 운동과 에큐메니칼 운동에 공헌한 존 알 모트 박사 세계 YMCA 운동과 에큐메니칼 운동에 공헌한존 알 모트 박사 모트 박사는 1865년 5월 25일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감리교 소속 평신도로서 대학YMCA운동에서 시작하여 전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의 중심인물이 되었다.즉 그의 약력을 간단히 소개하면, 1888년부터 1915년까지는 YMCA 국제위원회의 학생부 간사로 있었고, 1895년에는 WSCF 즉 기독학생연맹을 창설하여 다년간 그 회장이 되었다. 또한, 1910년에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획기적 사건인 에딘바라 대회(Edinburgh Conference)를 주최하여 그 계속위원회의 회장이 되었고, 1915년부터 1928년까지는 SVM, 즉 미국 해외 선교운동에 붐을 일으킨 학생자원봉사단(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회장이 되었다... 2018. 12. 4.
YMCA 인물 36. 이상향 건설에 몸바친 독립운동가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 선생 이상향 건설에 몸바친 독립운동가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 선생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 선생은 1864년 3월 25일 평안남도 정주(定州)읍에서 태어났다. 3.1운동 당시에 기독교측 민족대표로 활약한 남강은「내가 죽거든 몸뚱이를 땅에 묻지 말고 학생들이 만질 수 있도록 생리학 표본으로 만들어 학교에 두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나라와 민족을 사랑했던 위대한 애국자이다.YMCA와의 관계는 직접적으로는 남강선생이 창설한 정주 오산(五山)학교에다 학생YMCA를 조직하면서부터이고 간접적으로는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선생, 산농(汕農) 박승봉(朴勝鳳) 선생, 좌옹(佐翁) 윤치호(尹致昊) 선생들과 민족운동을 벌인데서 찾아볼 수 있다.그러나 먼저 선생의 생애를 보면, 가세가 너무 가난하여 11세부터 남의 .. 2018. 12. 4.
YMCA 인물 35. 3.1운동을 초교파적인 연합운동으로 이끌어간 33인 민족대표 국사(菊士) 오화영(吳華英) 목사 3.1운동을 초교파적인 연합운동으로 이끌어간 33인 민족대표국사(菊士) 오화영(吳華英) 목사 국사(菊士) 오화영(吳華英) 목사는 1879년 4월 5일에 황해도 평산군 평산면 대촌리에서 오석조(吳錫潮)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향리에서 한문을 배우고 한때는 동학난에 가담하여, 1891년에는 잠시 만주에서 망명생활을 한 적도 있다. 귀국하여 1901년부터는 구한국 정부의 우정판사(郵政判事)라는 관직에 있은 적도 있으나 2년 뒤 이를 사임하고 1911년까지 향리에서 장사도 하고 농사도 했다.국사 선생이 기독교 신자가 되기는 향리에서 장사와 농사를 할 시기인 것 같다. 그리고 1918년에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제 6회로 졸업했는데, 목회를 시작하기는 이보다 6년 전인 1912년부터이며, 1916년부터 3년 간 원산.. 2018. 12. 4.
YMCA 인물 34. 민족의 장래를 청년에게 걸었던 3.1운동의 33인 민족대표 월당(月塘) 최성모(崔聖模) 목사 민족의 장래를 청년에게 걸었던 3.1운동의 33인 민족대표월당(月塘) 최성모(崔聖模) 목사 월당(月塘) 최성모(崔聖模) 목사는 1874년 1월 9일에 서울 안국동에서 최영칠(崔永七)씨의 독자로 출생했다. 3백년 이상 서울 북촌에서 살아온 선비의 가문에서 태어난 월당은 15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할 생각은 없고 그저 집에 들어앉아 책이나 읽으면서 청년기의 울분을 달래었다. 그러다가 28세 되던 해 어느날, 친구 이필주(李弼柱, 33인 민족대표)씨와 함께 상동교회 문 앞을 지나다가 연설회 광고문에 이끌리어 들어가게 되었다. 그 날부터 두 청년은 그 교회의 전덕기(全德基)씨를 알게되었고, 그의 전도로 예수를 믿게 되어 상동교회의 교인이 되었다.YMCA회원이 된 것은 1906년쯤부터인가 싶다.. 2018. 12.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