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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Kairos International Anniversary Conference - Hope where there is no hope Kairos International Anniversary Conference Hope where there is no hope “Behold, I make all things new.” Revelation 21:5 December 6th - 7th, 2018Dar Annadwa – Bethlehem Day 1: Thursday, December 6, 2018 (15:30-20:00) 3:30 – 4:30 Ecumenical Prayer for Gaza and Justice in Palestine At the Greek Catholic Melkite Church 4:30–5:00 Candlelight Vigil to Dar Annadwa 5:00 – 7:00 Official Opening of the K.. 2018. 12. 4.
YMCA 인물 23. YMCA 최초의 체육간사인 소포(小圃) 김종상 선생 YMCA 최초의 체육간사인소포(小圃) 김종상 선생 한국 기독교청년회 사상 최초의 체육간사인 소포(小圃) 김종상 선생은 1885년 1월 14일 강원도 정선군(旌善君)에서 한학자 김찬배(金讚培) 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부모를 따라 서울에 온 그는 한학을 공부하고 일찍이 관립영어학교에 입학했다. 너무 어리기도하고 시골서 왔기 때문에 입학 자격이 없었지만, 함종(咸鍾) 부사를 지낸 바 있는 무관 출신의 그의 조부와 그 당시 학부대신(學部大臣)이던 민영찬(閔泳瓚) 씨와 가까운 친구였으므로 그의 특청으로 13세 때에 입학하여 1904년까지 거의 7년 간 영어를 공부했다. 처음 입학할 때는 장가를 든 성인처럼 가장하기 위하여 머리채를 올려 상투를 틀고 다녔으며 결혼은 16세 때에 오신원 씨와 했다.그가.. 2018. 12. 3.
YMCA 인물 22. 추강(秋岡) 김필수(金弼秀) 목사 추강(秋岡) 김필수(金弼秀) 목사 추강(秋岡) 김필수(金弼秀) 목사는 1903년 YMCA가 창설될 때 창설이사 중의 한 분이었다. 창설 이사 12명 중 한국인은 2명밖에 없었는데 추강 선생은 이 2명중의 한 분이다. 그만큼 추강 선생은 한국YMCA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다.추강 선생은 1872년 7월 경기도 안성군 삼죽면 죽산의 부유한 연안(延安) 김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가문이 본래 선비 가문이고 독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릴적부터 귀동자로서 한학 수학에도 남다른 대우를 받으면서 성장했다. 일찍이 청운(靑雲)의 꿈을 품고 상경하여 과거에 응시하고자 했으나 때마침 일어난 갑신정변과 박영효(朴泳孝) 등 개화당 지도자들과의 교분관계로 일본 고베(神戶)로 망명을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어린 관계로 역적의.. 2018. 12. 3.
YMCA 인물 21. 전덕기(全德基) 목사 전덕기(全德基) 목사 전덕기(全德基) 목사는 한국으로서는 감리교 상동(尙洞)교회의 초대목사이다. 그는 기독교 목사인 동시에 열렬한 독립운동가였다.그는 경기도 양평에서 1875년 12월 8일, 아버지 전성여(全成汝)씨와 어머니 임(林)씨 사이의 2대 독자로 태어났다. 불행하게도 그는 아홉 살 먹는 해에 부모님을 다 여의고 일찍이 고아가 되었다. 열두살 되는 해에 할아버지를 따라 서울 상동으로 이사를 왔다. 그의 할아버지는 숯장수였기 때문에 어릴 적에 숯장사 심부름을 하며 자랐다. 전덕기 소년이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것은 1892년 열일곱살 되는 때였다. 그때까지 그는 학교 문앞에도 가본 적이 없고 다만 언문(한글)을 배우고 성경만을 읽었다. 선교사 스크랜톤(W. B. Scranton) 목사(의사를 겸함)가.. 2018. 12. 3.
YMCA 인물 20. 기독교 사회운동가 김준성(金俊星) 목사 반공, 배일투사, 기독교 사회운동가김준성(金俊星) 목사 김준성 선생은 1898년 함경남도 단천(端川)에서 태어나 1978년 9월 28일 미국 뉴욕에서 세상을 떠나셨다. 한국을 떠나기는 1935년이었고, 예수를 믿기는 그가 10세 때인 1907년이었다. 단천읍 교회에 다니던 소년 김준성은 그 교회의 창설자의 한사람인 김병수(金炳洙) 장로에게 감화받은 바가 컸다. “너희들은 예수 잘 믿고 공부 잘하고 산업을 일으키라. 그래야만 나라가 독립이 된다”고 말하는 김병수 장로 밑에서 잔뼈가 굵어지고 신앙이 자랐다. 때마침 한일합방 직후 고향에 돌아와 전도사가 되어 민중을 깨우치며 돌아다니던 이동휘(李東輝) 선생의 감화를 많이 받았다. 이동휘 선생은 나라가 망하자 북만주 간도지방과 함경남북도 일대를 자기의 활동무대로.. 2018. 12. 3.
YMCA 인물 19.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선생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선생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선생이 Y운동에 가담한 역사는 크게 줄잡아서 셋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로 고당은 1908년부터 1913년까지 5년간 일본에서 유학할 때 재일본 한국 YMCA에 관여한 역사가 있고, 둘째는 1921년부터 1932년까지 12년간 평양 YMCA 총무로서 활약한 역사가 있고, 셋째는 한국YMCA 전국연합회의 이사 또는 학생Y 하령회 강사로 활약한 역사이다. 이 셋을 다시 성격별로 가려보면, 첫째는 고당이 학생Y운동의 개척자로서 또는 유학생Y운동의 선구자로서의 역사이며, 둘째는 평양Y의 창설자 및 실무총무로서의 역사이며, 셋째는 Y 전국연합회 및 학생Y 하령회 운동의 자원지도자로서의 역사이다.이렇게 보면, 고당은 약 12년 간은 Y 실무자로서 .. 2018. 12. 3.
YMCA 인물 18. 우남 이승만 박사 우남 이승만 박사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YMCA와 어떤 관계를 갖고 있었던가 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관심거리다. 그의 정치활동이나 망명 생활은 우리의 관심거리가 아니다.우선 YMCA와 관계하게 된 동기가 중요하다. 즉 그가 독립협회 사건으로 감옥에 있을 때 감옥 안에서 월남 이상재 선생을 만나게 된 것이 가장 큰 동기이다. 1904년 석방된 뒤 이승만 박사는 미국으로 망명갔으나 그 뒤 YMCA에 투신하게 된 월남 선생과의 연락은 끊어지지 않았다. 드디어 이승만 박사가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하자 월남선생은 그를 불러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마침 그때 이승만 박사는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졸업을 했으나 무엇을 해야할지 망설이고 있을 적에 서울에서 그레그(G. A. Gregg)란 사람이 찾아왔던 것.. 2018. 12. 3.
YMCA 인물 17. 우남(羽南) 이원철(李源喆) 박사 우남(羽南) 이원철(李源喆) 박사 우남(羽南) 이원철(李源喆) 박사는 1896년 8월 19일 서울 다동에서 이종억 씨의 4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 주위사람들로부터 신동(神童)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그 후 이 박사가 보성중학과 선린상업학교에서 중학교과정을 이수하고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것은 1915년이었다. 그의 천재성과 노력은 그로 하여금 연희전문학교 2학년생의 몸으로서 1916년 3월부터 1학년 수학을 강의하는, 말하자면 학생교수가 되게 하였다.1919년 1회로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1922년 1월까지 모교에서 전임강사로서 있으면서 후배양성에 전력하였다. 그러나 별빛에 인화된 젊은 이원철 선생은 연희 전문학교 수학강사로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천문학에 대한 그의 열정은 .. 2018. 12. 3.
YMCA 인물 16. 언더우드(H.G.Underwood, 元杜尤) 박사 언더우드(H.G.Underwood, 元杜尤) 박사 언더우드 박사를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만큼 그는 너무나 유명한 선교사이다. 그는 첫째로 한국 최초의 교회인 새문안교회의 창설자이다. 그러나 그는 한국YMCA 창설의 최초의 발의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887년 새문안교회를 창설하고 보니 그는 전도자로서의 대업을 성취한 느낌이었다. 허나 한구석 허전한 것은 아직도 이 나라 문화계에는 파고들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컸다. 모여드는 교인들이란 전부가 무식대중이었고 지식인은 하나도 없었다. 무식한 교인들이 먼저 교회당을 점령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비록 유식한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싶어도 교회에 나올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관념으로써는 무식대중과 유식한 사람들은 같이 앉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2018. 12. 3.
YMCA 인물 15. 뿌락만(Brockman) 형제 뿌락만(Brockman) 형제 뿌락만 형제란 Fletcher Sims Brockman과 Frank M. Brockman 형제를 두고 하는 말이다. 형 F. S. Brockman은 1901년부터 중국 YMCA 제 2대 총무로 15년 간 시무하다가 미국에 돌아가서 YMCA 국제위원회 부총무를 지낸 세계적인 Y지도자이다. 그리고 그의 동생 F. M. Brockman은 1905년 내한하여 1929년까지 일했다. 이 두 사람은 다같이 한국YMCA 창설의 공로자이다.우선 형 F. S. Brockman의 경우를 이야기하면, 1903년 3월 18일에 있었던 한국YMCA 창설준비회의의 강사로 초청되어 왔었다. 이 준비회의는 주한미국 대리공사 알렌(H. N. Allen)을 비롯하여 영, 독, 일, 중, 소 등 각국 공사 .. 2018. 1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