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숨의 끄적거림/숨

수치심을 잃어버린 공동체는 자신 뿐만 아니라 뭇 생명을 죽이는 칼이 될 것입니다. 내 뒤에 만들어지는 그림자를 볼 수 있는 성찰의 지혜가 필요할 때.

by yunheePathos 2012. 5. 13.

이제 시쳇 말이 되어버린 '운동'을 나는 '수원지'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맑고 깊고 고요하지만, 그 어떤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 큰 강줄기를 형성하는 수원지. 그리고 그 강 줄기에 맑은 물을 제공함으로써 온 생명의 생명수를 공급해주는 수원지. 

많은 사람들이 큰 강줄기만을 바라볼 때에도, 사람들이 찾아들지 않는 어느 숲 깊은 골짜기 한 가운데에 풍성한 나무와 새들의 집을 만들어 웅크리고 있으면서도, 외롭다 하지 않고 큰 강에 배을 띄우는 힘의 원천. 

그것이 수원지이고, 운동이 수원지라 생각한 이유입니다. 운동이 수원지처럼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라 생각했습니다. 맑고 고요하고 깊으면서도 그 안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강으로, 바다로 흘러가는 힘. 누구에게도 과시하지 않으나 가뭄과 같은 그 어떤 어려움에도 끊이지 않는 수원지. 운동이 수원지와 같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운동이라는 것을 배우면서 종교의 영역이 아님에도 종교 영역에서 성장해온 영성이라는 관념과 마음을 중요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고, 아직도 예수를 붙잡고 있는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수원지가 맑고 깊은 맛을 상실했을 때, 과연 강물이 온 생명의 생명수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그 당연한 질문에 당연한 답은 '아니다'입니다. 수원지가 탁해지면 강 물줄기는 썩어갈 것이며 누구도 수원지를 다시 찾지 않을 것입니다.

수원지가 존재할 수 있는 숲과 온 생명을 부정하고 홀로 고고하고 맑으며 강 물줄기도 홀로 만들어 배를 띄울 수 있다고 과시한다면, 과연 그 수원지가 수원지로서 보호되고 존재할 이유가 있을까요? 

운동이 수원지로서의 맛과 역할을 상실한다면, 얼마나 잔인한 세상이 될까요? 운동의 수원지는 어쩌면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아는 인간의 마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람이 부끄러워하는 마음과 수치심을 갖지 못한다면 세상의 공의와 정의는 무엇에 기초해 만들어질 것이며, 상식과 문화는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요? 단지 힘 있는 자들의 아량에 의존한 계약으로만 가능할까요? 아니면, 약자와 강자와의 끊임없는 투쟁의 과정에서 맺어지는 과정의 균형일까요? 


어쩌면 기독교가 말하는 '죄인됨에 대한 고백'과 '거듭남, 회개', '사랑의 기술'은 한 사회의 공의를 만들고 정의를 말하는데 중요한 힘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맹자의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생각나 찾아봤습니다. 의롭지 못한 일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意(의)의 근본이자, 인간관계와 사회를 밝히는 벼리라고 했다고 합니다. 

 

'나' 안의 그리고 내가 몸담고 있는 곳에 대한 부끄러움을 생각해보며, 진보라는 이름으로,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수치심조차 없는 일들에 젊은 청춘들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 더욱 마음을 안타깝고 아프게합니다. 내 뒤에 만들어지는 그림자를 헤아릴 줄 아는 성찰과 지혜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누가 어디에서 새로운 수원지를 가꾸고 있을까요? 요즘처럼 배에 몸을 싣기 위해 강가에 몰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배의 키를 잡는 멋진 선장이 되고자 배에 오르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은 수원지의 마음을 갖고 있는지 묻게 됩니다. 이미 수치심을 상실한, 수원지를 잃고  말라버린 강줄기가 아닌지 생각됩니다.  


수원지를 상실한 강물처럼 수치심을 잃어버린 공동체와 세력은 자신 뿐만 아니라 뭇 생명을 죽이는 칼이 될 것입니다. 

누가 어디에서 새로운 수원지를 가꾸고 있을까요? 나는 또 그 수원지를 만드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