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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의 끄적거림/숨

세상의 이치와 진퇴를 아는 분별력과 들고 남이 분명한 사람

by yunheePathos 2013. 1. 26.

2. 세상의 이치와 진퇴를 아는 분별력과 들고 남이 분명한 사람

올해 마지막을 잡고 있는 말 중의 하나가 '분별력'이고 '들고 남이 분명하자'는 말이다. 

그동안 막연히 가졌던 말들이지만 지금 내 가슴에 살아 팔팔 뛰고 있다. 돌아보면 나를 규정하고 나를 견디며 살아오게 한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말이었다. 어떤 정형화된 틀에 얽매여 살아가는 것에 거부감을 갖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나를 견디고 살아갈 수 있는 분별력을 갖게 하는 것, 가치는 무엇일까'를 최우선에 두고 살아온 것 같다. 물론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과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은 다른 문제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나 안의 문제로, 다른 그 무엇보다도 나만의 고백의 언어로 고민되고 따라서 다른 사람이나 집단과의 관계에서는 대단히 취약하기만 하였다. 나와의 생각이 다르거나 지향이 맞지 않다면 내가 어찌해볼 수 없다는 이유로 쉽게(?) 포기하거나 다른 방식의 나의 삶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독고다이(일본말로 특공대라고 나와 있고 혼자서도 할수있다, 당당한 자라고 표현되기도 하네요.)처럼 살아온 것도 사실이다.

나의 생각과 판단이 중요했고, 이것을 삶의 중심에 세우고 살아가는 방법에 몰두하는 것이 치열함이고 삶의 집요함이었다. 

이제는 이제는... 나만의 세계에서 만이 아니라 관계에서, 집단에서 사회에서 이것이 검증되고 객관화된 실체로서 드러나는 것이 중요한 때인 것 같다. 지금까지는 나와 내가 있는 공간에서의 삶이 중요한 기준이었다면, 좀 더 객관화된 세상에서의 가치와 분별력이 나에게 필요한 것이다. 

지금까지 이것을 구별하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나의 삶을, 나의 생각을 이제 나의 주관적 주장에 머무르지 않고 좀 더 객관적 실체로 가다듬고 세상 이치에 대한 분별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하는 과제가 있다. 

주체와 객체의 일체화된 실체로서 세상 이치에 대한 분별력을 다듬고 일과 관계에 대한 진퇴를 분명히 할 수 있는 사람, 이에 따라 들고 남이 분명한 사람. 

이제 50대를 준비하는 사람으로서 몇 년간 나를 가다듬는 생각이 되지 않을까. 

'세상 이치와 진퇴에 대한 분별력'과 '들고 남이 분명한 사람'이 되는 것. 또 다른 삶을 살아가야 할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생각이다. 

* 사진은 김용복 박사님의 상생도.


2012년 12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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