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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의 끄적거림719

[생명의 기도 ②] 아이들과 시민들의 영혼마저 파괴하는 사회 눈이 있다면 학부모들의 비통함을 차마 볼 수 없을 것이며, 가슴이 있다면 온 국민의 애통함에 눈물을 흘릴 것이다. 부도덕하고 무능력한 이들. 시민들의 눈물과 애통함에 같이 못하는 이들. 그들이 아이들을 죽이고 시민들의 영혼마저 갉아먹고 있다.아이들과 시민들의 영혼을 파괴하고 갉아먹는 사회 무기력한 나. 아이들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전락시킨 도망자 기성 세대. 무능력하고 책임질 줄 모르며 자기 밥그릇에만 민감한 이들.. 가면놀이의 정점에 있는 위임된 권력자들. 아이들과 시민들에게 무릎꿇어야 한다. 그리고 책임을 져야 한다. 원통한 소리를 전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선택한 처절한 학부모들의 청와대행을 막았다 한다.오지 않기에, 대책이 없기에 간다는데..... 왜 막는가? 생매장 당하는 자식들을 눈 앞에 두고 학부.. 2014. 4. 20.
[생명의 기도 ①] 죽어간 아이들과 사람들을 기억하며 이 땅에 부활의 경험이 일어나기를~ 부활 주일, 부활의 경험이 우리 안에 일어나기를 기도하며 아이들의 죽음에 먼저 회개하고자 합니다. "선장 개인만이 이 일을 책임져야하는 도망자가 아니라 기성세대 모두가 청소년들을 죽이고 그 현실을 외면하고있는 도망자였임을 먼저 고백합니다. 선장도 우리와 같은 평범한 도망자일 뿐입니다. 나 또한 아이들을 경쟁과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시킨 도망자였음을 회개합니다. 분노하고 아파하지만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묵인하고 타협했던 결과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 가운데 소중함을 알고 우리의 잘못을 처절하게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그렇게 만들었음을.일상가운데 아이들을 얼마나 외롭고 힘들게 만들어 왔는지를. 부모의 이름으로, 스승의 이름으로,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에게 강요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위선의 .. 2014. 4. 20.
시민사회운동의 원형이자 에큐메니컬운동의 전형, 다시 보는 평양YMCA 시민사회운동의 원형이자 에큐메니컬운동의 전형, 다시 보는 평양YMCA * 2014년 4월 17일(목) 자, 국민일보에 실린 글입니다. 이윤희 사무국장 한국YMCA 생명평화센터 ‘한국의 예루살렘’서 최초의 시민 운동 펼쳐 한국YMCA전국연맹 100주년과 더불어 작금의 한국교회 현실 속에서 ‘평양’을 재조명해볼 만하다. 기독교사적으로, 역사적으로, 한국의 시민사회운동사에서 평양이 지닌 의미는 특별하다. 특히 평양Y를 중심으로 펼쳐졌던 일제 치하의 기독교운동은 갈등과 대립, 반목과 분열로 방황하고 있는 오늘날 한국 기독교계와 시민사회에 에큐메니컬(교회일치·연합)운동과 시민사회운동의 표본으로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한반도 서북 지방의 중심지역인 평양은 한국 기독교사에 있어서는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렸다. .. 2014. 4. 17.
길이 없다면 길을 만들자.. 지금까지 그랬지만, 지금 나에게 절실한 마음이다. 겸손함을 잃지 않고, 오만하지 않으며, 사람들과 함께하며, 사람을 세울 수 있는 길. 출처 :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612429435446739&set=a.448889565134061.97471.448887631800921&type=1&theater --------------------------------------2013년 8월 28일, 페북 프로필에 올렸던 사진과 글.지금도 절실하다..겸손함과 온화함, 사람~~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583062111735043&set=a.313826508658606.70178.100000937770338&type=1&t.. 2014. 4. 13.
불편, 분노, 눈물, 어리석음의 축복을! ■ 2014년 WCC(세계교회협의회) 부산총회 폐회예배 때 남아공 성공회 사제인 마이클 랩슬리(Michael Lapsley)가 설교 마지막에 인용한 기도문. 랩슬리 신부는 인종철폐 운동 중에 두 손과 한 눈을 잃었다. ............................................ 불편, 분노, 눈물, 어리석음의 축복을!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불편함의 축복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손쉬운 답변들, 반쪽 진실들, 그리고 피상적인 인간관계에 견딜 수 없는 불편함을 느끼고 당신이 담대하게 진리를 추구하고 마음 깊이 사랑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분노의 축복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람들에 대한 불의, 억압, 착취에 거룩한 분노를 느끼고 당신이 정의, 자유, 평화를 위해 피곤을 .. 2014. 4. 12.
YMCA 이야기 ② “생명의 물결, 평화의 바람, 만물을 새롭게!” 짧은 글이지만, 한국YMCA 100주년 기념식에서 발표된 '새로운 세기를 향한 한국YMCA 비전 선언문'과 2013년 WCC 제 10차 부산 총회의 주제와의 관련성에 대해 기독공보에 실린 글립니다. YMCA 이야기 ② “생명의 물결, 평화의 바람, 만물을 새롭게!” 이윤희 (한국YMCA 생명평화센터 사무국장) 한국YMCA전국연맹은 지난 4월 2일, 결성 100주년을 맞아 ‘새로운 세기를 향한 한국YMCA 비전 선언 - 생명의 물결, 평화의 바람, 만물을 새롭게!’를 발표했다. 선언문은 YMCA가 “이 땅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하던 종말적 위기 속에서 탄생”했던 것처럼 또 하나의 세기를 다시금 “끝없는 전쟁과 폭력, 경제적 불의와 양극화, 기후붕괴와 생태적 파괴, 종교간 갈등과 충돌, 문화와 세대.. 2014. 4. 10.
UN이 선정한 최고의 시 - 아프리카의 한 소녀가 쓴 시. UN이 선정한 최고의 시 아프리카의 한 소녀가 쓴 시. 태어날 때 내 피부는 검은 색 When I born, I Black 자라서도 검은 색 When I grow up, I Black 태양 아래 있어도 검은 색 When I go in sun, I Black 무서울 때도 검은 색 When I scared, I Black 아플 때도 검은 색 When I sick, I Black 죽을 때도 나는 여전히 검은 색이지요. And when I die, I still Black 그런데 백인들은 And you, White fellow 태어날 때 분홍색 When you born, you Pink 자라서는 흰색 When you grow up, you White 태양 아래 있으면 빨간색 When you in sun, you.. 2014. 3. 19.
한국YMCA를 만든 선교사들 ㉻ 한국YMCA를 만든 선교사들 ㉻ J. R. 모트(John Raleigh Mott). ‘현대 판 바울’로 불리는 세계YMCA와 에큐메니컬 운동의 선구자이자 위대한 평신도이다. 국제적 시야를 갖춘 민족운동체로서 한국YMCA운동이 뿌리를 내리는데 있어 J. 모트의 기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한국 청년들의 Y 설립 청원운동(1899년)에 응답하여 1900년 라이언(D. W. Lyon)을 조사관으로 파견하였는가 하면 1901년 질레트(P. L. Gillett)를 한국Y 조직 간사로 파송하기도 했다. 1911년 일제는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Y 지도자들을 투옥시키는 한편 유신회(維新會)라는 어용단체를 조직(1913년)하여 YMCA를 점령하고 해산을 시도한다. 이에 모트는 일본과 한국을 방문하여 사건 수습에.. 2014. 3. 18.
자신과 직면하지 못하는 이유 자신과 직면하지 못하는 이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장점을 보며 스스로를 설득하고 정당성을 찾아 살아간다. 솔직하게 자신의 단점을 응시하고 직면하며살아가는 순간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자신이 가장 절실히 생각하는 것에 자신의 장점보다 오히려 단점과 부족함이 많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일까?그 절실함이 주어진 허위가 아니라면. 그래서 자신과 직면하는 것은 아프고 쉽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동안 쌓아온 자신에 대한 신뢰가 한순간 무너지는 경험을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의 부족함 안에 절실함이 있고 그 절실함 안에 사람에 대한 사랑과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음을 다시 생각해본다. 자신의 부족함에 솔직하고 절실함에 충실할 수 있는 비어있는 나를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시계 바늘보다 더.. 2014. 3. 18.
사랑과 배려는 정비례일까? 가까이 있는 사람일 수록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이해받기를 원하는 것 같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더 많이 이해한다는 착각 속에서. 그래서 타인에게는 대범해도 가족과 친구에게는 소심한가보다. 사랑한다는 사람에게는 특히. 사랑과 배려는 정비례일까? 아니면 반비례일까? 항상 정비례인 듯 하지만 어느 순간 준비된 반전처럼 급습해오는 상처는 나를 힘들게 한다. '나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왜 없을까?'를 물으며 아파하는 모습에 비추는 스스로의 실소를 어찌하지 못하며.. 그것의 이유가 상대이든 자신이든. 우리는 그렇게 타인을 아프게 하고스스로 상처받으며 살아가나 보다. 벗어나지 못하는 굴레일까?아니면 살아가는 행복일까? 2014. 3.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