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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컬, YMCA/YMCA458

2.8독립선언운동과 YMCA 2.8독립선언운동의 국내전입 경로3.1운동이 동경의 한국YMCA에서 진행된 독립선언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일제 정보통의 분석이었다. 그런데 그 선언서를 국내에 반입하고 국내 독립운동의 기운 조성, 아니면 그 기운과의 합류를 가능하게 한 연락을 수행한 이들이 대개 송계백(宋繼白), 최근우(崔謹遇), 서춘(徐椿, 1894-1943) 및 김마리아(1891-1944)였는데 이들이 다 기독교인들이었고, 그리고 송계백은 청년학관을 졸업한 인사였다. 그가 독립운동의 국내모사 주동인 최인(崔麟), 송진우(宋鎭禹), 최남선(崔南善), 현상윤(玄相允)과 만나 동경 상황을 제보함으로써 일대 거사의 시운을 합류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최남선이 나서서 기독교의 이승훈(李昇薰, 1864-1930)과 교섭.. 2018. 12. 5.
농촌 운동체로서의 YMCA ◆ 농촌 운동체로서의 YMCA1925년부터 시작된 농촌운동은 피폐한 농촌을 개발하고 복음을 전파하여 농민의식개혁과 농업발전에 대단한 영향을 미쳤다.․강령 : “우리는 농민의 경제적 향상, 사회적 결단, 정신적 소생을 도모한다.”․사업 - 야학과 주학개최 - 아동, 성인 교육 추진․농민강습소: 전국에 60여개 7,200명 학생 수용 (1926-1934). “정신적 발전소”라 칭함․협동조합운동 전개(1929년 서울기준) - 협동조합 : 11개 - 소비조합 : 5개 - 판매조합 : 11개 * 자료 출처 및 각주 등의 세부 정보는 첨부자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와이.엠.씨.에이의 농촌운동과 협동조합운동 1920년대 민족 개량주의 농촌운동이 한창일 때 농촌계몽운동, 농사기술보급운동 특히 협동조합운동을 활발히 전.. 2018. 12. 5.
YMCA 인물 53. 2.8 독립선언문 서명자 송계백 선생 2.8 독립선언문 서명자송계백 선생 -거족적인 독립운동 위해 국내외 밀사로 활약 1919년에 일어난 2.8독립선언의 주동인물인 송계백 선생은 1895년에 평안남도 영유(永柔)에서 태어났다. 송 선생이 YMCA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중학교를 졸업한 후 영어실력을 더 기르기 위해 3년제 중학영어와 주학부인 Y 학관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1914년에 보성중학교를 제 5회로 졸업하고 그는 3년 후에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민족적인 거사 2.8 독립운동에 가담케 됐다.또한 1915년 4월에 광주에서 열린 제 5회 학생수련회에 Y학관 학생대표로 다른 두사람과 함께 참석하기도 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가 일본에 건너가서는 재일본 한국YMCA의 당시 총무이던 백남훈(白南薰) 선생을 비롯해.. 2018. 12. 5.
YMCA 인물 52. 무사정신을 강조한 조병옥 박사 무사정신을 강조한조병옥 박사 -연희전문교수, 항일민족운동의 전위대 조병옥 박사는 동학난이 일어났던 1894년 3월 21일 충남 천안군 용두리(龍頭里) 목천(木川)에서 태어났다. 목천이란 곳은 최근 독립기념관의 건립터로 선정된 곳이며 이동녕(李東寧), 이범석(李範奭), 류관순(柳寬順) 등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태어난 고장이며, 류관순 영화에 나오는 “조(趙) 속장”은 바로 조 박사의 아버님이 된다. 그만큼 이 고장 사람은 예부터 독립정신과 정의감의 강한 사람들이었다.1908년 15세 때 5년제 공주(公州) 영명(永明)소학교 4학년에 편입, 17세 때 다시 4년제 평양 숭실중학 3학년에 편입, 1912년 이 학교를 졸업하고, 현 연세대학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년 간 고등교육을 받고 잠시 그 학교의.. 2018. 12. 4.
YMCA 인물 51. 영원한 한국인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박사 영원한 한국인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박사-세브란스 교수, 독립과 인권의 수호자 「내가 죽거들랑 한국 땅에 묻어주시오. 그리고 내가 평소에 도와주던 소년소녀들과 불쌍한 사람들을 계속 도와주시오」라는 유언을 남기면서 죽은 고(故)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박사는 1919년 3.1운동 때 한국민족을 위해 싸우다가 일경에게 강제 추방을 당한 우리 민족의 은인이다.그는 1889년 3월 15일, 영국 워리크주(Warwickshire) 럭비(Rugby)시에서 출생, 고향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친 뒤 19세 때(1907) 캐나다로 이민 가서 토론토대학 수의학과에 입학, 고학으로 1910년 동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다.졸업한 뒤 모교에서 세균학 강의를 하다가 19.. 2018. 12. 4.
YMCA 인물 50. 한국교회 토착화를 주장한 변성옥 박사 -목사, 정치가, 신학교 교수, YMCA 총무 한국교회 토착화를 주장한 변성옥 박사-목사, 정치가, 신학교 교수, YMCA 총무 감리교회 목사․신학교 교수․정치가․YMCA 총무이던 변성옥 박사는 1892년 평양 태생, 1913년에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나왔으며, 도미하여 1926년에 시카고 대학교에서 교육학을 전공, 신학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뒤 곧 감리교 협성신학교 교수가 되었고, 이어 미감리회 조선연회의 종교교육부 간사로 시무했다. 1930년 12월에 남북 감리교회가 합동될 때에는 유형기(柳炯基), 김성실(金誠實) 등과 함께 합동총회의 간부로 활약했으며, 그 뒤 조선감리회 선교연회의 만주 선교사로 임명되어 만주로 갔다.만주에 가서 선교를 하던 중 그는 1935년 1월 조선감리회 북만(北滿)지방회장 현성원(玄聖元)과 그 밖의 한동규(韓東圭), 우.. 2018. 12. 4.
YMCA 인물 49. 일본인에게도 존경받은 이상재 선생 2 일본인에게도 존경받은이상재 선생 -하나의 족자가 이해의 가교가 되다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선생은 동경 대진재가 일어났을 때 한국에 계셨으므로 그 난리를 직접 겪어보지는 않았다. 다만 그 소식을 서울에 앉아서 들었을 뿐이며 마음 속으로 아파했을 따름이다.그러나 선생은 동경 대진재와 깊은 인연을 갖고 있으니, 그것은 선생이 직접 쓰신 「一心相昭不言中」이란 족자와 얽힌 이야기이다.알다시피 1923년 동경 대진재가 일어나자 일본인 폭도들은 수많은 한국인 유학생들과 노무자들을 마구 잡아 죽였다. 이것을 보고 한 양심적인 일본인 의사 가와가미 쇼도무(小上昌得)이란 사람이 부상을 입고 거의 죽게된 한국인들을 자기 병원으로 옮겨다가 응급치료를 해주었다. 아무런 조건도 없이 무료로 입원시켜 치료해 준 것이다.그런.. 2018. 12. 4.
YMCA 인물 48. 3.1독립운동 민족대표 양전백(梁甸伯) 목사 3.1독립운동 민족대표양전백(梁甸伯) 목사 -학생Y 운동의 개척자로 지도력 발휘 한국장로교 최초의 7인 목사로 손꼽히는 분이며 3.1독립운동의 33인 민족 대표이신 고(故) 양전백(梁甸伯) 목사. 1869년에 평안북도 구성(龜城)에서 태어난 그는 타고난 학자의 기질과 재능으로 한학을 수학한 후 곧바로 마을 서당의 훈장이 되었다.때마침 만주에서 예수를 믿고 돌아온 백홍준(白鴻俊), 이응찬(李應贊), 서상륜(徐相崙) 등 초대교인들은 의주를 중심으로 철산, 구성, 선천의 각 군인(君人)들에게 만주로부터 들여온 기독교 서적을 배포하게 되었다. 이때 소년 양전백은 처음으로 기독교 서적을 보게 되었고, 구성 사람 김이련(金利鍊)과 김관근(金灌根) 부자(父子)의 전도로 26세가 되던 해에 기독교인이 되었다.때마침 청.. 2018. 12. 4.
YMCA 인물 47. Y 농촌운동과 에큐메니칼 운동의 개척자 백사당(白沙堂) 양주삼(梁柱三) 박사 Y 농촌운동과 에큐메니칼 운동의 개척자백사당(白沙堂) 양주삼(梁柱三) 박사 -Y운동 조직화와 한국NCC 창설에 공헌 아호가 백사당(白沙堂)인 양주삼(梁柱三) 박사는 1879년 1월 25일에 평안도 용강(龍岡)에서 출생했다. 4남매 가운데 맏아들인 그는 6세 때부터 한문공부를 시작했다. 유불선삼도(儒彿仙三道)로부터 시작해서 동학에 흥미를 갖기도 했으나, 우연한 기회에 만국공보(萬國公報)와 덕혜입문(德慧入門) 등의 한문으로 된 기독교 서적을 읽게 되면서 기독교에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20세가 되던 1899년에 그는 서울로 올라와 선교사들과 만나면서부터는 유학에 뜻을 두게 되었다. 헐버트(H. B. Hulbert) 선교사의 소개장을 얻은 그는 25원을 꾸려서 1901년에 상해로 가는 선박에 오르게 되어 남감리.. 2018. 12. 4.
YMCA 인물 46. 참다운 평신도상을 심어준 해사(海沙) 김명선(金鳴善) 박사 참다운 평신도상을 심어준 해사(海沙) 김명선(金鳴善) 박사 -인술을 통해 영혼을 구혼하는데 힘써 해사(海沙) 김명선(金鳴善) 박사는 1897년 10월 17일, 지금은 이북 땅이 되어버린 황해도 장연군(長淵君) 대구면(大救面) 송천리(松川里)에서 태어났다. 송천리는 보통 ‘소래’라고도 하고 ‘솔내’ 또는 ‘솔샘’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소나무가 울창한 계곡에 맑은 샘물이 콸콸 솟아 문전 옥답에 물을 넉넉히 대어주면서 황해바다로 잇고 있으며 소나무 숲과 바닷가의 모래밭, 그리고 그 위에 만발한 해당화의 절경은 유명하다. 그보다도 소래 마을은 한국 개신교의 요람지이기도 하다. 대개는 1885년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목사가 한국에 입국함으로써 처음 복음이 전파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미 소래마을에는 복음의 씨가 .. 2018. 12. 4.